언젠가 어느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이런 질문을 본 적이 있다. “우리 어렸을 때엔 동네 바보 같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요새는 안 보이네요. 건강상태가 좋아져서일까요?” 그 질문에는 “교육수준이나 건강수준이 높아져서가 아닐까요.”라는 답글도 달렸다.

전에 김미화 씨가 TV에 나와 아들이 발달장애라는 고백을 한 적이 있다. 김태원 씨는 <무릎팍 도사>에 나와 지금까지 아들이 자폐라는 고백을 했다. 이수근 씨는 아들이 뇌성마비라는 고백을 했고 신동엽 씨는 형이 청각장애인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많은 연예인들이 가족의 장애를 고백하며 말했다.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말을 못했어요.”

나는 『호연피망』이라는 작은 책에서 오빠가 미약한 발달장애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책을 누군가에게 줄 때마다 조심스러운 고백을 들었다. “실은 내 동생이” “실은 내 처제가” “실은 내 아들이” 덧붙여 이런 말도 들었다.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말을 못했어요.”

오빠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 뒤에야 나는 나와 아주 가까운 사촌동생들조차 오빠의 장애를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몰랐다고?”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으니까.”

나는 얼마 전에야 친하게 지내던 어머니 친구 분의 딸이 발달장애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충격을 받은 것은, 그분과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냈고 다른 딸과는 같이 자주 놀기도 했는데, 발달장애라는 딸은 30년이 넘도록 존재 자체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내가 그 집에 찾아가서 노는 동안 그 딸은 어디에 있었을까.

대한민국에 장애인으로 등록된 사람만 250만 명이 넘는다. 등록 기준이 높은 것을 감안하면 실제로는 그 몇 배가 되겠지만, 최소한 한국인 스무 명 중 한 명은 장애인이다. 전국 대학생 숫자와 비슷하다. 그런데 당신 주변은 대학생으로 넘쳐날 텐데 장애인은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다 어디에 있을까. 

감히 추측하건대, 한국인의 드넓은 친족 관계와 드높은 인구밀도를 생각해보았을 때,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주변에는 지극히 높은 확률로 장애인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그 이야기를 쉽게 다른 사람에게 하지 않았을 것이며, 또 쉽게 듣지 못했을 것이다. 쉽게 듣지 못했기에 당신은 그 일이 자신에게만 일어나는 일이라고 착각하며 속으로 삭이고 있을 것이다.

예전에는 그들을 위한 그 시설이나 제도가 없어서 거리에서 흔히 보았겠지만, 또 그만큼은 자연스러웠다. 시골에 내려와 살게 된 이후에야 나는 평범하게 마을 모임에 나와 같이 어울리는 농아자나 지체자를 보곤 한다. 그들은 모두 자연스러워 보인다.

예전에 캘리포니아 버클리 거리에 갔을 때, 나는 골목마다 휠체어를 탄 사람들을 내내 보았다. 평범하게 쇼핑을 하고 거리를 돌아다니고 버스를 탄다. 그들은 모두 평범해 보였다. 한국에도 다리가 불편한 사람들이 그만큼은 살고 있을 텐데, 그들은 모두 어디에 있을까.

이건 소수자의 이야기가 아니다. 대학생 숫자만큼이나 평범한 이야기다. 그러니 내 주변에 장애인이 있다는 이야기는 내 주변에 대학생이 있다는 이야기만큼은 평범해도 좋을 것이다.

예전에는 이런 이야기를 잘 하지 못했다. 10년 전에는 좀 더 어려웠고 20년 전에는 더 어려웠다. 그랬던 것이 참으로 이상스럽다. 이렇게 평범한 이야기를. 그리고 그만큼은 세상이 자라난 것이라고 믿는다. 또 내가 자라고 늙어가면서, 내가 과거에 왜 그랬는지 이상스러워 할 일들은 계속 늘어나리라고 믿는다. 그만큼은 또 세상이 자라나리라 믿는다.




김보영

소설가.

단편집 『멀리 가는 이야기』 『진화신화』와 장편소설 『7인의 집행관』을 출간했다.

현재 강원도에서 가족과 함께 피망과 아삭이고추를 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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