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판타지 도서관’이 세워진 것도 꺾어진 십 년. 불과 얼마 후면 5주년을 맞이한다. 그만큼 5주년 행사를 차근차근 준비해야 할 상황이지만 사실 도서관의 사정은 그다지 좋지 않다. 2년 전 이곳 연희동으로 이사 오고 규모는 확실히 커졌지만, 재정 상황이 열악한 것은 여전하며 아직도 찾는 이가 많지 않은 상황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작은 지하 창고에서 시작한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커졌으며, 찾거나 도와주는 분도 많이 늘어나고 있으니 다행일까? 불과 5년 전. 도서관을 만들기로 결심했을 당시엔 이렇게 계속되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으니 말이다. 생각해 보면 'SF&판타지 도서관'은 정말로 우연히, 그리고 돌발적으로 시작되었다. 2008년 4월의 어느 날 대전의 한 여관방, 술자리에서…….

이날 필자는 많은 이와 함께 대전 엑스포 공원에서 진행한 사이언스 페스티발에 참여하고 있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사이언스 페스티벌의 부속 행사로서 1박 2일의 SF 컨벤션이란 행사의 첫날을 진행한 후였다. 이 같은 행사는 본래 피곤하지만 즐겁고 보람 있는 것인데, 그날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모처럼 외부에서 예산이 주어져 이것저것 다양한 것을 해보고, 숙소까지 준비하여 같이 한 행사였지만, 사이언스 페스티벌이란 잔치에 작은 자리로서 진행된 행사는 솔직히 눈길을 끌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이언스 페스티벌 행사장으로 들어가는 통로라는 위치 문제도 있었지만, 그보다 우리가 준비한 것들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고, 이따금 관심을 가지는 이도 인파에 밀려 금방 사라져버렸다.

초대받지 못한 손님. 당시 우리는 이런 기분으로 둘러앉아 잡담으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날 밤의 술자리가 이런 얘기로 가득했던 것은 당연한 일. 그러던 중 내가 이야기했다.

“도서관을 만들겠습니다.”

그때 왜 그렇게 이야기했는지 지금으로서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당시 행사를 위해 여러 출판사에서 보내주었던 책이 아깝다고 느꼈던 것 같다. (사실 이런 기분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책은 독자에게 읽히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니까.) 하지만 한편으론 ‘SF 팬들이 함께 나눌 수 있는 공간을 갖고 싶다.’라는 열망이 더 강했다.

술자리의 이야기. 당시 자리에 있던 모두가 이를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였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필자는 진지했고 그 후로 이야기한 여러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해 겨울. 필자는 친지의 도움으로 한 장소를 싸게 얻게 되었다.

그곳은 사실 그렇게 좋은 장소는 아니었다. 주택 지하에 위치한 18평 정도의 창고 공간으로 바닥은 콘크리트 위에 비닐장판이 대충 깔려 있을 뿐이었고 여기저기 쓰레기가 쌓이고 천장도 곳곳에 구멍이 나 있었지만, ‘도서관을 만들고 싶다.’라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던 당시의 내겐(아니 우리에겐) 그야말로 꿈의 공간과도 같았다.





‘여기는 열람실’ ‘여기는 회의실’ 지금 생각해도 넓은 곳은 아니었지만, 여기저기 공간을 나누고 무엇을 할지 생각하는 것만으로 희망이 가득했다. 모두 함께 모여 페인트를 칠하고 정돈하였고, 난방을 위해 온돌 바닥을 깔고 타일을 씌우자 뭔가 공간처럼 보이게 되었다.

역시 모두의 도움으로 사이언스 페스티발 이후로 상자에 모셔두었던, 그리고 집에 쌓여 있던 책들을 옮기고 책장을 배치하여 책을 쌓으니 무언가 그럴듯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SF&판타지 도서관’의 시간은 시작된 것이다.


개관식부터 도서관은 장르팬을 위한 자리였음이 입증되었다. 개관식에 참여한 이들이라면 당시 고사상 위에 올려져 있던 누군가의 모습을 보고 미소 지었을 것에 틀림없다. 영험하신 베이더님의 포스 덕분인지 고사상에 꽤 많은 돈이 쌓였고, 뒤풀이 비용으로 충분했다.


‘SF&판타지 도서관’에서는 여러 가지 행사를 진행했지만, 첫 번째로 웃음이 가득했던 자리는 황금가지에서 나온 단편선집 『U, Robot』의 작가 분을 모시고 진행한 ‘작가와의 만남’일 것이다. 역시 도서관을 만들고 술자리에서 우연히 나온 이야기를 바탕으로 시작한 이 행사는 열 분의 작가 중 다섯 분이 참석해주셨고 많은 독자들이 함께하는 시끌벅적한 시간이었다. 행사를 마친 후엔 당연하다는 듯 뒤풀이가 있었는데, 조금이라도 맛난 걸 먹겠다고(사실은 자리 문제상) 사당역에서 이수역까지 굉장히 죄송해하면서도 “그래도 맛있어요.”라고 거듭 주장하며 걸어갔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사당의 도서관에는 수많은 추억이 함께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추억에는 SF와 판타지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함께 했다. 2009년의 봄, SF 컨벤션 행사장. 장소는 넓고 지나치는 사람은 많았지만, 우리는 외로웠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함께 해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18평 작은 공간의 ‘SF&판타지 도서관’에는 항상 내가,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누군가가 있었다. 바로 그것이 ‘SF&판타지 도서관’이 창립 5년을 앞두게 된 이유이며, 내가 장르 작품을 사랑하는 이유이다.




전홍식

SF&판타지 도서관 관장. 디지털 문화 정책 석사 전공. 게임 기획자이자 강사로 활동 중.

독서가 취미로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읽는다. 항상 즐거운 삶을 나누고 싶은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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