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원영 작가: 사랑이여, 나를 내게 보여 줘 (인터뷰 | 이서영)
사랑이여, 나를 내게 보여 줘
나는 아이폰 유저다. 아이폰에는 ‘자동완성’ 기능이라는 것이 있다.
자동완성 기능은 불편해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끄고 쓰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다. 나는 아이폰 3부터 아이폰을 사용해서, 지금은 6s를 쓰고 있지만 한 번도 자동완성 기능을 끈 적이 없다. 자동완성 기능은 내가 이 기계와 교류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유일한 기능이기 때문이다.
아이폰은 내가 자주 쓰는 말을 고려해서 오타들을 정정하고 내가 쓸 법한 말들로 만들어준다. 그러다보니 ‘수란먹어’를 ‘수렴해서’ 따위로 바꿔주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나는 아이폰이 그런 실수를 할 때면 은근히 아이폰을 사랑스러워하곤 하는 것이다.
내가 평소에 쓰는 말들을 다 기억하고 있는 귀여운 녀석.
이것은 이를테면 김춘수의 <꽃> 같은 것이리라. 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너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발견. 내게로 와서 그때 ‘수렴하다’라는 단어를 배웠다는 깨달음.
물론 나도 안드로이드를 사랑한다. SF를 쓰는 사람치고 안드로이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안드로이드에 대해 이야기 한다는 것은 가장 근접하게 인간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아이작 아시모프가 일찍이 우리에게 알려주었듯이.
양원영 작가가 직접 그린 <안드로이드라도 괜찮아>의 표지는 몹시 사랑스럽다. 도트로 이루어진 안드로이드의 실루엣은 빗자루를 들고 있고, 인간은 안드로이드에게 꽃을 건네고 있다. 우리는 빵 뿐만 아니라 장미가 필요하다고, 1900년대 여성 노동자들이 외쳤던가.
인간에게 ‘빵(생활에 꼭 필요한 것들)’을 제공해주는 안드로이드에게 인간이 ‘꽃(필수적이진 않더라도 존엄한 것들)’을 건네는 상황.
항구도시 부산서 서울까지 올라온 양원영 작가와 나는 뜬금없이 망원동에서 스시(…)를 함께 먹으며 대화를 나눴다. 바다 냄새 맡으면서 사는 사람에게 서울의 생선이라니!
이서영: “우리가 처음 안드로이드를 떠올렸을 때 생각하게 되는 건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할’ 같은 애들이잖아요. ‘그래, 내가 계산을 잘 해보니까 인간을 다 죽여버려야겠어’ 같은 생각을 하는.”
인간이 만들어 낸 안드로이드를 공포와 디스토피아의 기제로 사용하게 만드는 것은 그런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할 수 없는 완벽한 계산을 안드로이드가 하기를 기대한다. 그렇게 인간이 도무지 다다를 수 없는 완벽한 계산의 세계에 진입한 인간들은, 그 완벽한 계산 끝에 인간을 해하는 결론으로 도달한다. 안드로이드가 등장하는 소설의 한 전형적 형태다.
“그런데 이 소설 속의 안드로이드들은 굉장히 사람같거든요. 생각하는 형태가 사람같아요. 별로 기계로서 사고하지 않는다는 느낌.”
<디스토피아를 찾아서>의 화자는 ‘생각’을 하게 된 다음, 자신의 주인을 ‘염려’하여 머나먼 시간여행의 길을 떠난다. 이 안드로이드는 자신이 주인과 영원히 함께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며, 자신과 주인의 삶이 별개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순전한 인간적 ‘생각’으로 주인을 염려한다. 이것을 인간이라면 ‘마음’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양원영: “전 안드로이드가 감정을 가질 수 있다는 데에는 회의적이에요.”
생각지 못한 대답이었다.
“인간이 안드로이드가 감정이 있다고 믿을 수는 있겠죠. 믿고 그렇게 대해줄 수는 있겠죠. 그러니까 이건 투영의 문제예요. 내가 얘한테 뭘 투영하고 있는가. 내가 감정이 있다고 투영하면 있는 게 되는 거죠.”
혼란스러울 텐데도 엄마가 힘들어할까 봐 언제나처럼 밝은 미주로 돌아와 주어서 고마워.
부모를 위해야 한다는 프로그램 때문이라 자책하고 있니? 사람의 누군가를 위하는 마음도 저절로 샘솟지 않아.
배우고, 가르치고, 살면서 체득한 시스템이지. 너는 그 과정을 생략하고 일찍부터 가졌을 뿐이야.
― <인생> 중에서
“저는 안드로이드를 비어있는 그릇이라고 생각했고 그 안에 무엇을 집어넣을지는 인간인 화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모든 글들의 화자는 인간이거든요. 결국 인간인 ‘나’가 너희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
그러니까 자기 모습을 보는 거예요. 내 모습을 보이는대로 투영하되 내가 원하는 것만을 비춰주는 거울인 셈이죠.
연예인의 모습을 투영하면 연예인이 나오고 아버지를 바라면 나에게 아버지가 되어주었고. 어떤 의미로 보면 좀 섬뜩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네요.”
그렇게 말하고 양원영 작가는 웃었다.
나는 이 책에 대한 단평을 트위터에 가볍게 남긴 바가 있다.
“이 책은 사람을 매우 정직한 시선으로 사랑하면서, 동시에 사람의 세상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인상이다.”
작가의 의도가 인간의 애정, 집착, 온기, 혐오까지도 모두 투영해서 안드로이드라는 존재에 띄우려는 것이었다면, 인간의 삶에 대한 애정과 혐오를 동시에 느끼는 것도 그럴 법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소설은 결국 인간의 이야기지만, 이 소설 속 인간들이 안드로이드를 ‘이용’해서 자신의 삶의 빈 구석을 채워나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면 이 소설은 결국 안드로이드의 ‘마음’까지도 철저하게 ‘이용’해서 인간의 이야기를 서술한 셈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 소설 속 인간이라는 존재는 상당히 떨떠름해지고 말았다. 그러면 온통 안드로이드 얘기뿐인 이 소설 속에서 안드로이드란 대체 뭐지?
“저는 이세돌하고 알파고하고 붙었을 때 이세돌이 이기길 바랐어요.”
나는 조금 놀랐다. 물론 세간에서야 이세돌을 응원한 사람이 더 많았겠지만 내 주변의 SF 덕후들은 모두 알파고를 응원했으니까. 양원영 작가 자신의 말로는 이 소설을 SF라고 하면 부끄러워 죽을 것 같다고 하지만, 이 안드로이드 연작은 누가 봐도 어엿한 SF 아닌가.
“알파고는 어쨌든 인간을 위해 만들어졌다기보다는 대국을 위해 만들어진 거잖아요.
정서적으로 내가 교감하는 대상은 아니니까.
로봇청소기나 로봇개랑은 다르죠. 일반적인 컴퓨터에 대해서 애착은 없어요.
냉정하게 말하자면 사람에게 희생하지 않는 이상은 별 감정을 가지진 않을 것 같아요.”
단편집 속의 안드로이드들은 양원영 작가의 말대로 하나같이 애잔하기 그지없다.
<인조력시장만가(人造力市場輓歌)> 속의 모든 안드로이드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주인을 걱정하고 기다린다. <최후의 고백>에서 안드로이드 제이는 주인을 사랑한다는 한 마디 말을 하기 위해 먼 시공간을 뛰어넘는다.
그리고 <에필로그 : 청소로봇의 죄>에서는 기꺼이 자신의 사랑을 위해 죄값을 떠맡는다.
하다못해 <천녀보살 신드롬>에서는 결론적으로 인간의 삶을 망가뜨려 버리고 만 ‘천녀보살’조차도 진심으로 인간을 생각하고 걱정했기 때문에 그런 결론으로 나아가게 된다.
“천녀보살의 인격모듈은 선생님이 마련한 안드로이드에 장착되어 무척 큰 시너지를 일으켰습니다.
안드로이드의 우수한 기능이 더해져 기존 천녀보살의 부족했던 상황판단력을 보충하고 더 교묘하게 사람을 속일 수 있도록 발전한 것입니다. 선생님에 대한 집착은 안드로이드가 가진 주인을 위하는 속성을 인격모듈이 거스를 수 없어서 생겨났습니다.
천녀보살은 나름대로 선생님을 지키고 돕고자 했습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 <천녀보살 신드롬> 중에서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기던 날, 나는 술에 취해서 대체 왜 내가 출근을 해야 하냐고 한탄을 했다.
저렇게 훌륭한 AI가 있다면, 진작에 인간은 노동해서 해방되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만일 알파고가 나 대신에 여러 일들을 수행해주고 내 삶에 도움을 준다면, 나는 정말로 알파고를 많이 좋아하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로봇청소기를 산 사람들이 한결같이 로봇청소기를 귀여워하듯이.
하지만 인간이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할을 두려워하는 것은 인간을 위해 일하지 않기 때문은 아니다.
이서영: “알파고가 지는 과정을 보면서 저는 SF적인 영감을 좀 받았거든요.
78수에서 어긋나기 시작하니까 완전히 이상한 방향으로 망가져 버리잖아요. 분명 안드로이드들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요.
기본적으로 인간의 도덕률이 입력되어 있기야 하겠지만, 인간의 도덕률이 알아볼 수 없는 모자이크로 보였을 때 완전히 망가져 버릴 수가 있지 않겠어요?
이 소설 속의 안드로이드들은 어때요?”
양원영: “저도 그런 생각 많이 했어요. 자동주행 시스템에서 불가피할 때 사람을 칠 것인가 말 것인가 같은 문제들. 이런 건 답을 잘 못 내리겠어요.
안드로이드를 만들면 그 윤리는 인간이 부여하겠죠.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처럼.
그걸 생각하면 결국 적응하게 될 것 같아요.
심지어 처음 기계가 도입되었을 때도 사람들은 디스토피아적 상상을 했어요. 사실 저는 그런 미래에 대한 부정적 예상에 반발하는 심리도 있었던 것 같아요.”
설령 네 모든 판단이 내가 바라지 않는 형태가 될지라도, 그래도, 엄마는 네가 세상에 오래 남아주었으면 하고 바라.
이건 온전한 내 욕심이야.
― <인생> 중에서
박사는 어떻게든 미주의 삶을 제약하려고 한다. 기계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가 버린다면, 그때부터는 더 이상 기계를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도 명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주의 엄마인 희정은 다르다. 희정은 미주에게 진짜 ‘삶’을 살아가기를 요청한다.
중요한 것은 이것 역시 인간의 욕망이며, 인간의 기대치라는 것이다. 인간은 꿈꾸는 것이 가능하고, 인간이 꿈을 꿀 때 안드로이드는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인간과 함께 무한에 다가서려고 시도할 수 있게 된다.
“분명 인간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 안드로이드에게 제약을 걸겠죠. 하지만 그럼에도 그걸 넘어서길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은 안드로이드는 넘어설 것 같아요.”
문탠로드로 언제부턴가 이름이 바뀐 달맞이 고개 아래의 작은 어촌마을인 미포에서부터 동해남부선 기찻길로 접어들었다.
평일 낮 시간대에는 걷는 사람도 드문드문했고 그마저도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저 앞에 걷던 사람들이 정신차리면 어느 순간 없어지니 미희는 꼭 현실이 아닌 꿈의 길을 방황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 <최후의 고백> 중에서
연작 소설이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을 굳이 짚는다면 나는 미희와 제이 커플을 짚고 싶다.
이들이 가장 많이 등장한다는 점도 그러하지만, 다른 여러 사람들 중에서도 안드로이드와 인간의 한계를 가장 많이 뛰어넘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제이와 미희는 단순히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도움을 주는 것을 뛰어넘어 ‘사랑’을 하고, 그것을 고백한다.
시간과 모든 법칙을 뛰어넘어 제이는 미희에게 끝내 그것을 고백하고 만다.
제이가 그것을 고백하는 장소가 바로 부산의 송정역 근처다. 미희에게 그곳의 풍경은 지극히 일상적이다. 미희는 일상적인 불행을 살아가고 있는 여고생이다. 그 일상적인 풍경을 무너뜨리는 것이 미래에서 날아온 안드로이드 제이라는 점은 매우 의미가 깊다.
사랑은 폭력적인 과정이다. 일상은 사랑에 의해 낭만적이고 폭력적으로 무너지고, 그 폐허 위에 사랑은 새로운 일상으로 자리를 잡는다. 미희는 제이에게 이미 그 폭력으로 위치하고, 제이는 과거의 미희를 찾아가서 일상의 풍경을 다시 그린다.
“부산은 항구도시죠. 항구는 사람들이 오고 가는 데고요.
거기다가 관광도시니까 여름만 되면은 400만 명이 몰려왔다가 싹 빠져나가고 그러거든요.
이러다보니까, 만나고 헤어지는 게 너무 자연스러워요. 떠난 사람은 떠나고, 남아있는 사람은 남아서 떠난 사람을 그리워하고. 떠나버리면 안 돌아오는 사람들이 많았죠. 6.25 사변의 마지막 피난처였고, 가장 중요한 무역항이었고.”
얼마 전에 서울의 이화마을에서는 관광객이 보고싶지 않다는 이유로 누군가 벽화를 없애버렸다. 부산이라는 도시에는 모두에게 ‘비일상’인 풍경을 ‘일상’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뿌리를 깊이 내린 사람들은 끊임없이 파도가 왔다가 쓸려가는 장면을 목격해야만 한다. 그렇다고 해서 파도가 해송에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제 친한 친구들은 다 상경을 했어요. 고등학교 친구들 중에 부산에 남아있는 애가 거의 없어요.
저한테는 언제나 헤어짐의 도시였네요. 저는 익숙해졌어요. 떠나고 싶지 않아요.
우스갯소리로 했던 말이 친구들한테 언제든 오고 싶을 때 오라고, 난 여기 있겠다고 말한 적이 있거든요.”
“미희, 당신을 사랑합니다. 미희,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어둠에서 빛이 폭발했다. 미희가 아득한 정신을 떨치고 눈을 떴을 때에는 여전히 휑한 선로 한가운데였다.
저 멀리 송정 바닷가의 모습이 보였다. 비는 어느샌가 그쳤고, 산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이 온몸을 훑었다. 구름 사이에서 쏟아지는 빛이 바다를 황금빛으로 물들여 눈이 부셨다.
제이는 없었다. 그런 사람이 있었는지조차 의문이 들 만큼,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철길을 걸으며 중간중간 보이지 않던 사람들처럼 제이도 모습을 감췄다.
미희는 멍하게 나머지 길을 걸어 송정역에 도착했고, 길의 끝에서 그만 주저앉아 엉엉 울고 말았다.
― <최후의 고백> 중에서
소설 속에서 제이는 ‘당신을 귀찮게 만들어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상대방을 귀찮게 하고 싶은 마음, 상대방의 일상에 개입해서 그 프레임을 새롭게 구축하고 싶은 마음.
인간과 인간이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고, 무엇보다 사랑은 가장 격렬하게 그것이 일어나는 과정이다.
제이가 미희에게 끝내 자신의 ‘생각’이 ‘사랑’이라는 감정임을 인정하게 되는 것은 그 맥락 위에 위치한다.
연인의 이야기를 실컷 했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소설집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이야기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오랜 시간을 거쳐서 소설 속의 사람들은 안드로이드를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이미 일상 속에 젖어든 안드로이드들은 사람을 위해 복무하는 존재에서 사람에게 소중한 존재로 새로운 옷을 입는다.
“저 스티븐 스필버그예요. 가족 이야기 엄청나게 많이 써요. 근데 좀……
소위 ‘정상가족’ 이야기는 잘 안 쓰게 되더라고요. 친부모가 아니라거나, 유사가족이라거나. 안드로이드도 피가 섞인 존재는 아니잖아요. 반려동물들도 있고.”
“생각해 봐, 12년을 함께 살았어. 생판 모르는 남도 몇 년 같이 지내다 보면 가족처럼 여겨지기 마련인데.”
“사람하고 안드로이드가 같아? 아무리 정교해도 기계잖아.”
“사람이 아니더라도. 몇 년씩 써 온 물건에도 애정이 생기잖아. 왜 이름 붙여주고…….”
― <아빠의 우주여행> 중에서
사전적 의미로 가족이란 ‘부부를 중심으로 한,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으로 규정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그렇지 않은 수많은 가족들을 알고 있다.
누군지 모르는 사람을 어머니로 생각하고 살기도 하고, 반려동물을 자식이라고 부르면서 살기도 한다.
엄밀히 말하면 ‘시어머니·시아버지’야 말로 피 하나 안 섞인 ‘남’이 아니던가. 그리고 세영은 자신의 ‘아버지’로 호명되어 온 안드로이드를 아버지로 받아들인다.
“사고방식에 따라 이런 이야기에 거부감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해요.
동물이라면 그래도 이해를 하겠지만, 살아있지도 않은 걸 가지고 연인처럼 대한다거나 엄마아빠처럼 따른다는 게 말이 되겠느냐고.
주변 분들이 이거 보고 저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도 하기는 했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라는 말에 대한 가장 좋은 대답은 ‘그럴 수도 있지’ 라는 것을 오래 깨달아 왔다.
대부분은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 따름이다.
가족의 문제로 얘기하자면, 반려동물 등록제가 그렇고, ‘사실혼’ 관계의 많은 커플들이 그렇다.
한국 사회의 시선보다 조금 더 넓혀서 말하자면 성소수자 부부들이 그럴 것이고, 반려인 신분의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시대와 생각에 따라서 관념은 변화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남편의 부인과 소실들이 서로를 언니라고 부르는 사회를 살지 않았던가.
이전 내 고양이를 나는 남동생처럼 대했다. 그 고양이가 죽고 나서 지금 키우는 고양이를 아이처럼 대하고 있다. 내게 와서 그들이 서로 다른 의미로 정착하는 과정을 행복하고 가슴아프게 지났다. 안드로이드는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존재일 것이다.
나는 지나간 시대를 살아왔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로봇 청소기를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며 쓰다듬는 경우에 대해 양원영 작가에게 말했다. 사실은 그 사람들도 얼마든지 다양한 가족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이미 다 알고 있을 거라고.
“가장 좋아하는 안드로이드는 뭐예요?”
조금은 고민을 할 줄 알았는데, 양원영 작가는 한 번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게임 <크로노트리거>에 나오는 로보를 제일 좋아해요.”
나는 그 게임을 해 본 적이 없다. 로보와 피오나의 숲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는 눈물이 그렁해지고 말았다.
이 인터뷰를 읽고 나서 게임을 해 볼 사람들을 위해 스포일러는 넣어두겠다. 양원영 작가의 입으로 들은 ‘로보’라는 안드로이드는 무척 사랑스러운 녀석이었다.
“다음 소설은 어떤 걸 구상하고 계세요?”
“지금 준비하고 있는 건 플라멩고 얘기를 쓸 거예요.”
아는 분들은 다 알겠지만, 양원영 작가는 훌륭한 춤꾼이다.
“스페인 내전 시기에 여자애 두 명이 플라멩고를 추는 이야기예요.
집시 댄서 아가씨와 기타를 치는 어린 소녀. 두 소녀의 관계를 중심으로 쓸 생각이예요. 다른 예술을 쓰는 걸 좋아해요. 바이올리니스트와 오케스트라 이야기도 썼었고, 오페라이야기도 썼었고, 탱고 이야기도 썼었으니까, 이번엔 플라멩고로!”
포탄이 떨어지는 가운데 춤을 추는 이야기를 볼 수 있을 모양이었다.
“전란 시대에 예술이 겹쳐지면 엄청 포텐셜이 있는 것 같아요.”
“예술은 무망한 거고, 전란은 삶이 직결되는 건데 삶이 무망해지는 순간에 무망한 걸 끝까지 하고 있다니 쓸데없이 멋있어서!”
“이 책을 읽을, 읽은, 읽고 있는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양원영 작가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게 제일 싫다고.
그러다 돌아온 답변은 책 표지만큼 산뜻했다.
“보고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뭘 투영해도 좋으니까 생각할 여지가 있고 행복한 방향이었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사람들이 밝아졌으면 해요,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다른 미래가 올 수도 있잖아요.”
양원영 작가가 가장 사랑한다던 로보에 대해서 ‘조금’만 스포일러를 하자면,
로보는 만들어진 목적과 다르게 주인공에게 다가온다. 원래는 좀 더 나쁜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세상을 구하는 팀의 일원이 된다.
양원영 작가의 안드로이드들도 비슷하다.
청소를 하는 로봇으로 만들어졌지만 연인이 되고, 일시적 순간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영속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아름답다고 느끼지만, 사실 거기까지 가기에는 엄청난 행동과 결의들이 필요하다.
나는 이런 것들과 아주 비슷한 몇 가지 행위를 알고 있다.
첫 번째는 소설을 쓴다는 것이다.
그냥 흘러지나가는 여러 이야기들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해서 의미 있는 하나의 서사로 구성하는 것. 그 안에서 독자와 작가는 자기 자신이 정말로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 찾아낸다.
두 번째는 사랑을 한다는 것이다.
양원영 작가는 안드로이드가 자신을 ‘투영’하는 매체라고 말했다. 인터뷰를 다 끝내고 나서, 나는 어쩌면 이것이 ‘투영’만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내 안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나를 비춰주는 거울이라니, 그것은 오히려 ‘발견’에 가깝다. 내가 지금껏 보고 있지 못했던 나를 내 일상을 무너뜨리면서까지 찾아내 주는 것.
그것의 이름이 사랑이라는 건 세상이 다 안다.
소설 속에서 안드로이드 제이가 ‘생각했다’고 말할 때, 제이의 연인인 미희는 ‘느꼈다’고 말한다.
우리는 모두 안드로이드가 아니기 때문에 서로의 진심을 수치화 할 수도 없고 계량할 수도 없다.
하지만 이게 결국 인간의 이야기라는 것은 그런 말이다. 읽는 이가 행복하길 권하는 말이다.
서로의 진심을 추측하고 머뭇거리는 우리들 모두에게, 사랑해도 괜찮다고.
이렇게 안드로이드처럼 서로를 서로에게 보여주면서. 오늘도 내 아이폰은 내가 치려고 했던 말을, 내가 자주 입력했던 말로 변환해 준다.
나도 네가 왜 그러는지 다 알아.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