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일 작가: 역사는 운명 따위에 지지 않는 법 (인터뷰 | 이서영)
역사는 운명 따위에 지지 않는 법
<메르시아의 별>이라는 게임이 있다.
TRPG 알못인 나는 잘 몰랐으나, 검색만 몇 번 돌려봐도 굉장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게임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이 소설은 그 게임의 서장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정확히는 이 게임의 제작사인 '초여명'의 김성일 대표와 이 책이 나온 출판사인 '온우주'의 이규승 대표가 만나서 벌어진 일이다.
이규승 대표는 이 게임의 서장같은 소설이 있으면 좋겠다고 지나가는 말로 말했는데, 김성일 대표가 서장을 자신이 썼다고 대답해버린 것이다. 이규승 대표는 게임 <메르시아의 별> 세계관으로 소설을 한 권 써 달라고 '쫓아다녀가며 부탁을 했다'고 한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게임은 적지 않다. 하지만 게임을 원작으로 한 소설은…… 많지는 않다. 많은 경우 이런 소설들은 게임에 대한 일종의 머천다이징으로 팔린다. 그러나 소설 <메르시아의 별>은 머천다이징으로 나온 것이 아니다. 소설 그 자체로서 유의미하게 출판되었다.
한 번이라도 게임을 해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어떤 게임이건 게임은 그 세계 안에서 작동하는 룰을 가진다. 게임 속에는 목표와 한계, 의지가 존재하고 그 안에서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데에 게임의 묘미가 있다. 소설의 캐릭터를 배경 위에 얹어놓는 작업도 마찬가지다. 선명한 배경이 존재하면, 그 안에서 캐릭터들은 자신의 논리를 가지고 길을 찾아간다. 때로 작가는 그 논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찾아내는' 것에 모든 역량을 사용해야 할 때도 있다. 이 소설은 사실 물어보아야 할 것이 많지 않은 작품이었다. 캐릭터들과 배경이 모두 각자의 논리를 분명하게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임 <메르시아의 별>을 접해 본 적이 없었기에, 먼저 궁금했던 건 게임에 대한 것이었다. 소설 안에 있는 섬세한 설정들이 게임 속에서는 어떤 식으로 구현되는지.
"처음 이 게임을 만든 건 2002년, 2003년 정도예요. 그 당시만 해도 TRPG를 할 때는 마스터(TRPG를 진행하는 사람)가 설정을 다 해 왔어요. 플레이어들은 단지 캐릭터만 만들어서 게임을 했죠. 저는 플레이어들이 그걸 넘어서서 세계의 일부까지 좀 더 만드는 게임을 생각해 봤어요. 지리, 역사 같은 것들을 만들어서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도록 제공하는 거죠. 기본적인 큰 틀로는 '제국'이 있습니다. 모든 다른 나라를 지배하는 강력한 제국입니다. 플레이어들은 제국에 뭔가를 뺏기고 지배를 당해서 독립 운동을 하는 설정이예요."
"아이디어 자체가 플레이어한테 설정을 맡기겠다, 이런 데서 왔다는 말씀이시죠?"
"예. 특히 한국 사람한테는 굉장히 편리할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서양 사람들과 대화하다보면 '식민지 서사'라는 걸 이해 못 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계속 듣고 자란 식민지 서사가 있잖아요. 그런 한국적 감상을 판타지 세계에 보편적으로 적용시킬 수 있겠구나……."
"그러면 이 소설의 구체적인 배경설정은 지구 역사 배경으로는 언제쯤을 짐작해야 할까요?"
"그건 많이 섞으려고 했어요. 다양하게 나타나고 싶었거든요. 제국의 이미지는 기본적으로 로마제국을 모델으로 삼았어요. 로마시대는 고전시대지만, 이 제국에는 극도로 발달한 테크놀로지가 있죠. 마동기관이라는. 그리고 아를란드로 가면 중세의 왕과 기사 이야기가 나와요. 그건 게임과 똑같아요. 게임에서도 다양한 시대배경으로, 시대고증을 할 필요 없이 플레이를 하도록 했거든요."
플레이어 자신이 좀 더 많은 것을 결정할 수 있는 게임은, 마스터와 플레이어 간의 관계가 조금 더 수평적이 될 것이다. 형식과 내용은 별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실제로 많은 작품들이 그렇지 않다. 영화도 문학도 게임도 마찬가지다. 반드시 형식은 내용을 담보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민주주의라는 국가형태나 공화국이라는 형태가 그 내용을 담보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메르시아의 별>이라는 게임이 가지는 형식, 그리고 이 소설이 가지는 형식에 대해서 다시 주목해 보았다. 더욱이 이 소설은 세 명의 주인공을 가지고 있다.
*
제국에는 여러 속국들이 있지만, 이 소설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속국은 '아를란드'다. [아를란드 외에는 카모리와 레돈이 있다. 영국의 지방이름들을 조금씩 뒤튼 이름이다. 잉글랜드(England)는 아를란드, 웨일즈의 옛 이름인 컴리(Cymru)는 카모리, 스코틀랜드의 옛 이름 칼레도니아(Caledonia)는 레돈에 해당한다.] 아를랜드, 카모리, 레돈 모두 제국에게서 탈주하고 싶어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서로 정답게 동지국으로서 우애를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제국으로부터 아를란드가 해방되는 과정을, 이 소설은 세 명의 주인공을 중심으로 따라간다. 한 명은 아를란드를 지키는 수호신, 화룡에게서 힘을 얻은 '자칭' 아를란드의 공주 로란, 또 한 명은 진짜 적성을 찾아서 기숙학교(?)를 도망나온 꼬마 마법사 아리엔, 마지막은 사랑하는 여인의 발자취를 찾아 헤매는 복수귀(…) 케인이다. 이 설명이 믿을만한 지는 책을 사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캐릭터 하나. 로란
소설의 시작부분을 열어젖히는 주인공은 로란이다. 검사, 조금 더 정확히는 검술교사였던 로란은 제국으로 인해 남편과 딸을 모두 잃었다. 모두를 잃어버리고 나서 로란은 그 모든 것을 되찾기 위해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바꿔나가기 시작한다.
"로란은 시작할 때부터 가족이 없어요. 다 죽었어요. 이 사람은 더 남은 게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가능할지를 따지지 않고 화산에 뛰어들었죠. 거기서 용을 만날 수 있다는 전설을 믿은 건데, 사실 저는 로란이 그 전설을 어느 만큼 믿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사실은 죽으러 갔을 거라고, 자살하러 갔을 거라고 생각을 해요."
나는 아를란드의 공주다. 이 나라의 왕이 될 것이다. (11p)
모든 것을 상실하고, 용이 없다면 죽어버리겠다는 생각으로 화산에 간 서른 살의 과부 검사는 제국의 마법에 묶인 채 구속당한 용을 마주한다. 용의 고통과 슬픔을 본 그녀는 그곳에서 자신이 아를란드의 왕이 되겠다는 결심을 한다.
"상실의 경험이라는 바탕이 있잖아요. 사람들은 살면서 가끔씩 그 경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투영하죠. 로란은 거기에 기반해서 더 달려나갈 수 있는 거예요. 로란은 남편하고 딸이 말려들지 않았으면, 계속 그렇게 살았을 거예요. 검술교실에서 칼싸움 가르치면서. 제자들이 출세하면 이제 뭐 기부금이라도 받으면서.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거든요. 내가 당했으니까 누군가가 또 다치면 안 된다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가족을 상실한 로란의 경험은 마을 주민들에게 확장되고, 민족으로 확장되고, 끝내는 '국가'의 형태까지 확장된다. 제국에게 무언가를(금전이건 자유건 행복이건) 빼앗긴 사람들에게 로란은 이입하고, 자신을 공주로 자칭했을 때처럼 로란은 스스로를 왕으로 자칭하게 된다. 사람들은 로란이 스스로를 어떤 의무의 위에 얹을 때마다 그만큼의 기대를 건다.
로란은 생각했다. 자기가 항복하러 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저 요새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뒤에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있다. 그날 밤의 빛 기둥을 보고 온 사람들이다. 농민이 많지만, 왕도에서부터 온 사람들도 적잖이 있다. (……) 에메르는 로란에게서 운명을 보았다고 했다. 로란은 여기 모인 사람들에게서 같은 것을 보았다. 25군단의 본대가 아를란드를 멸망시킨다 해도, 설령 메르시아의 별이 아를란드를 잿더미로 만든다고 해도, 그것까지 포함해서 전부 이 나라의 운명인 것이다. 로란은 우르마스를 꺼내 하늘을 가리켰다.
"아닙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제국의 요새를 공격합니다. 돌아가고 싶은 사람들은 돌아가도 좋습니다."
뒤에서 천둥과 같은 함성이 일었다. (217p)
그리고 로란은 정말로 왕이 되고 만다. 로란의 이야기는 '운명'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조금 다른 부분이 있다. 로란의 정체성은 먼저 선언되지만, 그 정체성이 로란을 구성해 나간다. 로란은 아를란드의 공주라고 스스로를 선언했기에 그 지향점을 통해 구성되어 나간다. 로란 자신도, 로란을 둘러싼 주변도 로란을 공주로 만들어낸다. 왕이 되기 위해 달려가는 공주는 왕이라고 선언하고 나서 왕의 위치로 점해진다. 자신이 행동해 나가는 방향대로 정체성이 만들어진다. 역사는 반드시 사람을 구성한다. 때로는 우연적인 사건도 그 역사에 결합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어떻게 살아가겠다는 인간의 의지가 개인사의 구성에는 큰 부분을 차지한다. 로란은 자신의 삶을 구성해서 역사를 바꿨다.
마동기관, 클라리오스와의 싸움에서 화룡이 패배했을 때 로란의 어깨에는 날개가 돋는다.
온몸이 온천에라도 잠긴 듯 따뜻해졌다. 로란의 심장은 큰 북처럼 울리고 있다. 그것은 화산에서 나는, 용이 자는 소리와도 닮아 있다.
날개가 활짝 펴졌다. 마치 원래부터 갖고 있던 것처럼 자유자재로 펄럭였다. 로란은 날아올랐다. 심장이 갈수록 크게 울렸다. 인간의 작은 몸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클라리오스도, 화룡도, 윌프리드도, 아리엔도, 아를란드 사람들도 불기둥의 빛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336p)
"로란이 어떻게 될 지는 알았어요. 로란은 용이 돼요. 용이 됐어요."
단호하게 말하고 나서 김성일 작가는 잠깐 생각하다 다시 덧붙였다.
"아닐 수도 있죠. 뭐, 누가 알겠어요."
캐릭터 둘. 아리엔
아리엔은 자신의 능력을 아직 다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다. 그녀는 순진하고 무구하다. 다만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싶다는 한 가지 욕망만으로, '나쁜 마법사' 엘드레드를 자신의 몸 속에 봉인하게 되었다. 그녀의 무기는 그 순진하고 무구함에서 온다. 바로 '상상력'이다.
"제일 목적이 개인적이죠. 딱 자기에 관한 거니까. 저는 세 주요인물 중에서 아리엔이 제일 좋거든요. 도와준 사람은 한 명(케인)밖에 없고, 머릿속에서는 꼰대 마법사가 들어앉아서 이래라 저래라 하고."
"꼰대 마법사가 성격도 나쁘고."
"나쁜 놈이니까."
"나쁜 놈이어도 성격은 좋을 수도 있잖아요!"
"나중에 어떻게 변심할지 모르니, 내일은 저런 놈 정도 순식간에 죽일 수 있는 주문을 가르쳐주마." (78p)
마음 속에서 엘드레드가 아리엔에게 끊임없이 주문하는 것은 배신과 악의다. 엘드레드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고압적인 태도로 끊임없이 아리엔의 마음 속에서 악의를 깨워내기 위해 노력한다. 아리엔의 마법사적 능력이 자신의 상상력에 있다는 것은 그런 아리엔의 상황에 비추어서 여러 가지로 의미심장하다. 로란이 자신의 꿈을 현실로 부지불식간에 일구어내는 사람이라면, 아리엔은 아무리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상상하고 꿈꾸는 것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다. 바로 그 상상이 아리엔을 위험에 빠뜨리기도 하지만, 결국 아리엔이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게 하는 핵심적 동력이 된다.
"아리엔은 계속 '당해'요. 이용당하고 싶지 않아서, 오로지 스스로를 위해서 도망도 가고 마동기관도 훔치는데, 그것마저도 아리엔을 이용하려고 하는 나쁜 마법사 엘드레드가 따라붙었죠. 그 나쁜 마법사의 적이라고 하면서 따라붙은 리산드로스는 이번엔 다 없던 일로 해주고 다시 학교로 돌려보내주겠다고 해요."
"그렇죠. 너의 모든 선택을 내가 그냥 다 지우겠다는 거죠."
"그렇죠. 그런데 그걸 다 이겨내죠. 자신의 처지에서 최소한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더 나은 것을 계속 선택했어요. 자기 머릿속에 가장 큰 압력이 들어있는데도 그것마저 이겨내고요."
아리엔은 깨달았다. 자기가 지금까지 계속 해 온 것, 가장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리엔은 케인이 이야기해 준, 아를란드의 공주를 떠올렸다. 공주는 반짝이는 갑옷을 입고 불타는 검을 들고서 용의 등에 타고 있다. 생김새는 왠지 자기를 닮았다. 상상 속의 공주가, 들고 있던 검을 내 주었다. (246p)
아리엔에게는 세계를 되찾겠다는 욕망이나 대의같은 건 없다. 아리엔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세계"다. 우리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이 그렇듯이 아리엔은 자신을 지키고 싶어하고, 스스로 결정하고 싶어하며, 선량하다. 세 주인공 중 아리엔은 가장 민중에 근접한 인물이다. 자기 삶에 대한 통제와 결정권을 가지고 싶어하는 아주 단순한 욕망. 물론 우리 대부분이 실현하고 있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리엔이 세상을 돌파해 내는 것은 민중의 무구함과 상상력이다. 자기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 세상을 구해내고, 아리엔은 통제력을 되찾는다. 원형적인 신화에 나올 법한 이야기이며 동시에 아주 사소하고 작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캐릭터 셋. 케인
케인은 사색적인 인물이다. 로란과 아리엔이 그녀들의 행동, 벌어진 현실에 그녀들이 어떻게 대응하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케인은 움직이기 전에 오래 생각하는 사람이다. 많은 것을 듣고 추적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는 떠난 연인 그레첸이 어째서 죽었는지 알고 싶기 때문이다. 그레첸의 복수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기 위해선 움직이기 이전에 많이 생각할 수밖에 없다.
"트위터에서 탐정래빗님께서 이런 질문을 해 주셨어요. ' 케인에 대해 쓰실 때, 떠올리신 탐정소설이 있으신지. 있다면 어떤 책인지 궁금합니다.'"
"저는 일단 대실 해미트를 좋아하고요. 제일 좋아하는 작가는 윌리엄 깁슨인데, 그 사람도 해미트 계보를 그대로 이어받았어요. 저는 항상 깁슨을 흉내내려고 해요. 그러다보니까 저 사람은 어디서 배웠나를 찾아보기도 했거든요. 케인은 제가 하드보일드 탐정소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서 많이 빌려온 캐릭터에요. 다만, 메르시아의 별 자체가 탐정소설은 아니니까 빌려온다고 해도 한계가 있기는 하죠. 그래서 딱 어느 한 작품을 참조했다기보다는 '하드보일드 주인공 같은 모양새'를 맞춰보려고 했어요.
이를테면 - < 브릭 >이라는 영화 아세요? 고등학생들이 나오는 하이틴 영화인데 - 배경만 고등학교고 사실은 하드보일드 서사예요. 하드보일드 영화에 나오는 외부의 거부할 수 없는 압력처럼 등장하는 '경찰'이 여기서는 교장과 교감이고, 갱 보스는 고등학교에서 와일드한 애. 주인공이 집에 찾아가면 엄마가 학교에 주스와 과자를 가지고 오는. 영화 시작 부분에 주인공의 전 여자친구한테 전화가 오는데, 그 다음날 시체로 발견돼요."
"고등학생 영환데?!"
"네, 미국 고등학교는 그럴 법도 하니까요. 그걸 찾아가는 얘기에요."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구조네요."
"네. 내 예전 여자친구가 죽었어. 왜 죽었나 파헤쳐보자. 그런 캐릭터는 항상 좋아해요. 하지만 케인은 계속 그렇게 갈 수는 없죠. 바뀌어야 되거든요. 범인이 누군지 안 단계에서 끝날 수가 없는 게, 기본적으로 하드보일드 탐정소설에서 피해자는 그냥 피해자에요. 피해자라는 물건이에요. 그냥 시체에요. 그게 주인공의 옛날 여자친구였다던가 하는 건 그냥……"
"기폭제죠."
"네. 그냥 동기를 부여하기 위한 거예요. 그런데 그 동기로 시작을 했어도 케인은 그렇게 될 수가 없는 게, 케인의 서사도 케인이 왕이 되는 얘기거든요."
"……?"
"죽은 그레첸의 자리를 이어받아야 해요. 그레첸은 자기가 보호하고 있던 사람들이 그 테러로 죽거나 다치거나 손해를 볼 거기 때문에 반대했다가 죽은 거예요. 그러니까 케인은 그걸 이어받아야 돼요."
"어둠의 왕이 된다는 거군요."
"그렇죠. 대부에서 비토 콜리오네처럼 될 지 모르죠."
장례식에 왔던 아를란드 사람들의 부탁대로 그레첸의 묘지에 좋은 묘비를 세워야 한다. 글라디스의 사무소를 정찰해 준 아야나와 아이들에게 돈을 더 주어야 한다. 그레첸이 그간 돕던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레첸이 하던 일을 계속해야 한다. 새 직장을 찾아야 한다. 첩보청의 세 사람도 후에 다시 볼 일이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앞으로는 바쁜 나날이 될 것이다. (312p)
나름대로 하드보일드 주인공다운 결말이다.
"아, 그러고보니까 트위터에서 온 질문 중에 왜 소설 속에 파티가 없느냐는 이야기도 있던데. 사실 저는 케인이 제일 처음 아리엔을 도와줬을 때, 여기에서 듀오가 되나? 했는데 스쳐지나서 가버리더라구요."
"저는 처음에 생각했을 땐 같이 가는 걸로 생각을 했었어요. 같이 아를란드로 가는 걸로 처음에는 생각을 하고 플랜을 잡았었는데, 쓰고서 처랑 얘기도 해 보고 그러니까 이게 그러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주도권이 둘 중에 한 명한테 가요. 엘드레드한테 가던지 케인한테 가던지. 아리엔이 주체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이유가, 자기 머릿속에 있는 마법사를 안 믿기 때문이잖아요. 엘드레드를 믿고 있으면 시키는대로만 하면 되죠. 그런데 케인이 같이 가면 얘는 의심 많고, 관찰력 있고, 똑똑하고, 그러니까."
"아, 케인이 머리가 되고 아리엔이 마법을 쓰는 수족이 되어버리는구나."
"네, 그렇죠. 그러면 아리엔이 애초에 등장한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메르시아의 별>이 가진 주된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여성캐릭터의 활약일 것이다. 가장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존재들은 여성들이며, 가장 사색적인 존재는 남성이다. 남성은 뒤에 있고, 여성은 활동한다. <이갈리아의 딸들> 같은 형태로 뒤집혀 있는 '페미니즘' 소설은 아니지만, <메르시아의 별>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모두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며, 행동하고 사고한다. 아를란드가 되찾은 왕은 여성이고, 아를란드의 마법사도, 최고대신도 모두 여성이다. 나는 이 점이 '굳이 물어봐야 될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작가에게 이 질문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굳이 한 번 더 짚어주고 싶다. 여성에게 주어지는 롤이 이렇게 다양할 수 있다고.
"하지만 아리엔이랑 엘드레드, 화룡이랑 로란은 파티라고도 볼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마이클 무어콕의 <엘릭 사가>에 보면, 주인공 엘릭이 스톰브링거라는 마검을 갖고 다녀요. 영혼을 빨아먹는 마검인데, 엘릭은 이 무기에서 도망가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도망가지 못하죠. 그런 관계… 그러니까, 저도 지금까진 생각을 못 했는데 엘드레드와 아리엔은 저주받은 아이템과 주인공의 관계 아닐까요."
연기 속에서 무언가 검붉은 것이 엄청난 속도로 튀어나왔다. 왼쪽 눈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화룡이었다. 등에 튀어나온 비늘덮인 돌기 하나를 꽉 껴안고 있는 사람이 있다. 아리엔이다. 허리에는 우르마스를 찼다. 이리로 날아오고 있다. 타고 있는 사람이 버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빠르다 했는데, 날개가 한 번 펄럭이더니 속도가 더 오른다.
클라리오스가 몸을 빙글 돌렸다. 로란은 마동기관실의 뚜껑 옆에 있는 손잡이에 매달렸다. 시선은 화룡에게서 떼지 않았다. (329p)
<메르시아의 별> 속에 등장하는 문장들은 빠르다.
글 자체도 속도감 있게 읽히는 서사지만, 그렇게 술술 읽혀내려가는 데에는 속도감 있는 문장 덕도 적지 않을 것이다. 특히 액션과 전투신이 등장할 때면 문장은 내달리는 데에 더욱 박차를 가한다. 숨 막히는 느낌으로 소설을 읽어 내려간 데에는 분명히 그 원인이 있다. 숨도 제대로 못 쉬고 헐떡이면서 한 장을 다 지나치고 나서, 엄청나게 쫄보가 되어 다음 장으로 넘어갔더니 문제가 쉽사리 해결되어서 가슴이 턱턱 내려앉는 경험을 자주 하며 읽어야 했다.
"문장에 수사가 별로 없고, 인물의 행동 중심으로 서술되더라구요. 행동과 행동이 연결되니까 속도가 빠르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그래서 전투신은 더 박진감 있어진 것 같고요."
"전투 부분에서는 그렇게 쓰여지더라구요. 빨리 쓰여요. 원래 형용사나 부사를 별로 좋아하질 않아요. 시점 캐릭터의 감정보다는 생체 반응을 쓰는 걸 선호해요. 화가 났다고 안 하고, 이가 악물렸다고 한다거나. 슬프다고 안 하고, 눈물이 찔끔 난다고 한다거나."
"생각해보니, 정서를 묘사하려면 속도감이 빨리 나긴 어려울 수도 있겠네요."
"저는 감정은 글씨로 쓰이기보다는 글씨 사이에 있으면 더 좋다고 생각해서요."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보다는 얼굴을 찌푸렸다-가 좋으시다는 거죠?"
"네, 우울했다는 더 싫고."
그러면 이제 이 문장이 만들어낸 심장의 '쫄깃쫄깃함'에 대해서 얘기해야 할 차례다.
*
"저는 사실 보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재밌었는데 이야기가 이렇게 끝까지 밀려갔다가 다음 장에서 고무줄 놓듯이 풀리는 장치들이 있잖아요. 용이 엘드레드에게 사로잡혔을 때, 케인이 죽기 직전까지 갔을 때처럼. 저는 정서적으로 몰입이 심한 편이라 이런 쫄깃쫄깃하고 극적인 부분들이 정말…… 아, 나빠요. 정말."
"사실 저도 '이래도 되나?' 하면서 썼어요. 그런데 조지 R. R. 마틴은 매 챕터를 그렇게 끝내더라구요."
……이게 다 조지 R. R. 마틴 때문이다.
소설 내부에서 '메르시아의 별'이 무엇인지는 명확하게 나오지 않는다. '메르시아의 별' 때문에 멸망한 메르시아의 나라가 등장하고, 메르시아의 별이 두렵지 않느냐는 호통이 등장할 뿐.
"메르시아의 별이라는 병기에 대해서는 들어보셨습니까?"
"물론이죠. 모르는 사람이 드물지 않을까요? 저 자신은 그런 게 있다는 것을 완전히 믿기가 어렵습니다만…."
저항하면 나라 자체를 없애버린다는, 제국의 궁극 병기.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사용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소문이 무성할 뿐이다. 그러나 존재한다는 것만은 모두가 믿고 있다. (104p)
"메르시아라는 나라가 저기 멀리 따로 있잖아요. 백 년 전에 거기가 독립선언을 했다가 메르시아의 별이라는 거에 맞아 사막이 됐다. 그래서 제국에서는 심하게 반항하는 속국은 군대 파견조차 안 하고 박살을 낼 수가 있다는 거예요. 중간에 엘드레드가 얘기하잖아요. 메르시아는 독립 선언 같은 거 한 적도 없고, 메르시아의 별은 그저 사호(死號)다. 하지만 진실은 알 수가 없죠. 기본적으로는 핵이죠."
"저도 핵에 가깝다고 생각은 했어요. 게임 <문명>에서 맨하탄 프로젝트 완성해서 핵 떨어뜨리면 도시가 없어지는 것처럼. 하지만 이게 제목이니까요."
"쓰고보니 저도 왜 제목이라고 했나 싶기도 한데……. 이게 제국의 '궁극적인 무력'의 상징이잖아요."
"제국의 힘이라고 '믿는 것'이라는 뜻인가요?"
"그렇죠. 지금까지 인류 역사에 핵무기가 사용된 건 한 번 밖에 없어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죠. 그것도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서 쓴 건 아니예요. 실험으로 떨어뜨렸단 얘기가 설득력이 있어 보일 정도로요. 상륙전 하면 수많은 미군 병사들이 죽는다고는 하지만 핵무기 때문에 수많은 일본 민간인들이 죽었어요. 그 이후로 아무도 안 썼죠.
국제사회는 이스라엘이 핵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핵무기를 갖고 있다고 말한 적이 없어요. 적어도 이제 이스라엘에 쳐들어갈 나라는 없어요."
권력은 타자를 제어할 수 있는 힘이다. 그렇기에 권력은 타자를 제어해서 점점 더 강성해 질 수 있다. 민중의 눈을 장악하면 귀를 장악할 수 있고 사고를 장악할 수 있다. 공포를 느끼게 할 수 있고 안정을 느끼게 할 수 있고 자유를 박탈할 수도 있다. 사람들의 손발을 묶는 것보다 공포를 느끼게 하는 것이 근원적이고,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는 것보다 압도적인 힘이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 강력하다.
권력에게는 자기 자신을 유지하려는 본능이 있다. 누구라도 권력을 가지게 된다면 그 권력의 속성에 복속되게 된다. 권력이 자기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팽창할 수밖에 없다. 통제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도. 바로 그 권력의 본질적인 속성이 '메르시아의 별'인 셈이다.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와 무관하게. 저항하지 않는 한 권력의 팽창은 막을 수 없다.
"차기작 구상을 알려주세요."
"사장님이 2권 써달라고…… 써야죠…….
2권에서는 아리엔이 메르시아에 가요. 그래서 메르시아의 별이 뭔지를 알아달라고 로란이 부탁을 했기 때문에. 그리고 거기서 엘프들을 만나요. 아리엔은 제국에서 자랐잖아요. 제국에서 교육을 받았단 말이에요. 지금은 버리고 와 있지만 그래도 생각하는 방식이 제국사람이죠. 이 엘프들은 인간이 아니에요. 짐승보다 조금 나은 수준으로 생각이 되죠."
"흔히 말하는 '호모 사케르'네요."
"네, 집단 단위의 호모 사케르죠. 영국 역사에는 하드리아누스 방벽이 있죠. 남쪽 사람들은 좀 다스릴만하다고 생각해서 로마식 마을도 짓고, 교역도 하고, 창칼로 협박해서 일도 시키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그 위에 있는 픽트인들에 대해서는 다스릴 가치도 없다고 벽을 쌓았죠. 엘프는 아니지만 <메르시아의 별>에서도 등장해요. 아를란드 북쪽에 있는 레돈이라는 나라 남쪽은 지배를 하고 있지만 북쪽은 정벌대상이죠. 이들은 그만큼의 힘도 없어요. 아예 인간이 아니니까.
하나 더 얘기하자면, 200년 전의 메르시아를 그리고 싶어요. 엘드레드가 아직 멀쩡한 상태로 메르시아에 있고, 리산드로스가 처음 갔을 때. 리산드로스는 물론 제국의 정복 사업의 일환으로 간 거죠. 여기서는 시점을 리산드로스의 아들인 아기 클레톤의 어머니 시점으로 쓰려고 해요. 클레톤의 어머니는 당시 메르시아에서 폭군 엘드레드에게 저항하던 사람이예요."
"그러니까, 정복하러 간 제국주의자랑 현지의 레지스탕스가 그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다는 거죠?"
나는 이 타이밍에서 '말린체'를 떠올렸는데, 순간 말린체의 이름이 기억 나지 않아서 나중에 얘기해준다고 하고서는 깜빡하고 김성일 작가에게 얘기를 안 했다.
지금 언급하자면 말린체는 마야의 여자 노예다. 언어적 재능이 뛰어나고 무척 총명한 여성이었다고 한다. 그녀가 노예로 팔려가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다. 아즈텍에게 정복당한 국가의 (국민이었다가) 노예가 되었다고도 하고, 여성에게 상속시키고 싶지 않았던 그녀의 부모가 그녀를 팔아넘겼다고도 한다. 여하간 그녀는 노예의 신분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녀에게 자신의 삶을 통째로 바꿀 기회가 찾아온다. 코르테스에게 '화평을 위한' 노예로 팔려간 것이다. 그녀는 코르테스의 아이를 낳는다. 그녀는 아즈텍을 점령하는 데에 가장 많은 정보를 줬을 뿐만 아니라, 아즈텍 황제를 코르테스의 인질로 만드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운 코르테스의 '통역가'였다. 그리고 말린체라는 이름은 남아메리카 사람들에게 배신자, 나라를 팔아먹은 창부의 상징이 되었다.
인류는 역사를 바꿔왔다. 역사는 우연의 집합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일정한 프로세스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그 프로세스가 발현되는 자장은 우연으로 발생하기도 한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한 누구라도 우리가 모두 익숙하게 접해왔던, '역사'의 흐름에 푹 빠져들어 읽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모름지기 환상은 현실의 거울인 법이고, 이 소설 속에 있는 인물들은 생생하게 살아있다. 잘 만든 인물들이 흔히 그렇듯이 나는 소설 밖에서도 이 인물들이 살아있으리라고 믿는다. 그런 인물들은 작가의 세계를 넘어서게 마련이다. 사실 내 마음 속에도 로란이 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