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궤도의 끝’에서 살아남은 자들 by 바벨
{여성작가SF단편모음집} 중 「궤도의 끝에서」를 읽고-
‘궤도의 끝’에서 살아남은 자들
by 바벨
지구가 반파되기까지 여섯 시간 사십오 분을 앞둔 시각, 리우는 먼저 죽은 슈를 생각한다. ‘너에게 수학을 배우지 않았더라면. 네가 수학을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너를 ...하지 않았더라면.’
전삼혜 작가의 「궤도의 끝에서」는 세계의 멸망을 목전에 둔 리우의 회상을 따라간다. 리우는 나비 지뢰 때문에 양쪽 다리를 잃은 뒤 부모에게 버림받고 보육원에서 시력을 잃은 슈를 만나 ‘짝’이 된다. ‘후원자가 없는 아이들에게 특별한 기회를’ 준다는 제네시스에 들어가기 위해 두 ‘짝’은 수학을 가르치고 배운다. 슈는 홍수에 휩쓸려 실종되지만 리우는 슈 덕분에 제네시스에서 살아남는다. 그것은 나비 지뢰가 낳은 나비 효과가 되어 ‘슈가 마을 하나를 더 구한’ 셈이 된다.
지구가 박살 날 정도는 아니지만, 빙하기는 오게 할 소행성이 지구를 향해 날아오고 있다. 제네시스는 ‘제네시스의 대부분과 지구 전체를’ 속이고 있었다. 도망칠 곳이 없는 고아들이 서로를 지키기 위해 끈끈해지고, 사랑에 빠져야 하는 곳. 거기에 혼자 온 리우는 비밀을 알고 나서 ‘어쩐지 마음이 편’해진다. 혼자만 살아남은 것이 아니기에. 슈처럼, 죽을 수 있기에. 슈에게 수학을 배웠기에, 슈가 수학을 좋아했기에, 슈를 ...하였기에 소행성의 크기를 조금 더 줄일 수 있었다. ‘동업자’ 단이 중얼거린다. “네가 수학을 슈한테 배웠다고 했으니까, 어떻게 보면, 슈가 마을 하나를 더 구한 거지.”
사랑을 잃는 것을 하나의 세계를 잃는 것에 빗댄 작품은 많다. 「궤도의 끝에서」가 거기서 한 걸음을 더 나간 지점은 그 사랑이 살아남은 자들에게 남긴 유산에 주목한다는 것이다. 작법에 나오는 표현을 빌리자면 ‘그것은 주인공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그 이후 주인공은 어떤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지나는가’가 그런 유산이 아닐까 한다. 유산을 물려받았을 때 주인공은 그것을 가슴속 깊숙한 서랍에 넣고 잠그거나 또 다른 주인공을 위해 물려 줄 준비를 남몰래 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누군가에겐 ‘수학’이고 누군가에겐 ‘창세기의 첫 구절’이다.
「궤도의 끝에서」를 덮자 전삼혜 작가의 전작들을 다시 펼쳐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가 연작이라고 밝힌 「창세기」와 나머지 이야기들에서도 미완의 청소년들은 서로 사랑하며 세상과 싸웠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에서도 나름의 유산을 남기고 있었다. 전삼혜 작가는 해당 작품집 작가의 말에서 ‘2014년 봄에 사라진 304개의 우주’를 추모했다. 거기에 ‘1999년 여름에 사라진 23개의 우주’를 더해본다.
많은 독자가 소설 밖 세상에서 우린 어떤 우주를 잃었고 어떤 유산을 받았는지 발견해보길 바란다. 그러면 「궤도의 끝에서」의 세계를 조금 더 감동적으로 유영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사족. 작가가 게임 시나리오 스크립터이기 때문일까? 등장인물의 젠더는 읽는 분이 정해도 좋다는 작가의 말 때문일까? 세상의 멸망에 맞서는 주인공들 때문일까? 아니면 이름 때문이었을까? 슈의 모습 위로 <에베루즈>에서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성별이 변하는 노이슈가 계속 겹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