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지/10호 소식지

이 달의 작가 : 은림 작가 인터뷰 ( 인터뷰 | 이서영 )

온우주출판사 2014. 10. 1. 23:19

우리 안의 잎맥들을 닮아가는 이야기





생각해 갔던 가장 쉬운 질문은 “어떤 식물을 좋아하세요?” 였다. 책의 제목은『노래하는 숲』이며, 그녀의 소설들은 온갖 색깔의 식물들로 점철되어 있었기에, 가장 쉽게 떠오른 문장이었다. 곧바로 돌아온 대답은 적이 당황스러웠다. 


“식물 안 좋아하는데요? 식물 좋아하면 식물 키우겠지. 고양이 키우잖아.”


은림 작가는 명랑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어조가 빨랐고 자주 웃었다. 때때로 곧고 가느다란 비자나무 같은 눈빛이 반짝였다.

“그러면 대체 왜 이렇게 식물을 많이 쓰신 거에요?”


당황하여 되는대로 곁가지라고 말하기도 어정쩡한 질문을 뱉었다. 너무 오래전에 쓴 소설들이라 잘 기억이 안 난다던 은림 작가는 잠깐 생각하다가, 단순하면서도 깊은 대답을 했다.

“처음 반했던 건 웅장함? 그런 거였던 것 같아요. 숲에 깊숙이 들어가면 공기가 아예 다르잖아. 사람 사이에 있는 거랑, 나무 사이에 있는 건 공기의 무게부터 차이가 있죠. 그런 것들이 좋았어요.”


나는 『노래하는 숲』의 ‘웅장함’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나는 지구 한구석에서 작은 씨앗이 싹을 틔우고 줄기를 뻗고 잎을 살랑이며 사람처럼 춤추는 것을 보았다. 놈들의 출현으로 인류가 공들여 다진 문명은 부서진 지표 포장처럼 속절없이 뒤집히고, 타르 찌꺼기 밑에서 창백하게 썩어가던 대지는 발가벗고 햇살과 입 맞추었다. 댐에 가로막혀 있던 강은 유쾌하게 바다를 향해 내달리고 멸종했던 열대 나비가 날아올랐다. 창 너머 세상은 플랜의 눈처럼 어지럽도록 오색 찬란한 빛으로 가득했다. 아직 미완성이었지만 나는 그게 다음에 올 새로운 지구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거기 핀, 지상 전체를 뒤덮은 새로운 지배 종은 인간이 아니라 사람의 상체와 식물의 하체를 가진 꽃들이었다. 

― 「환상진화가」중



인간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배제된 새로운 세상에 대한, ‘웅장한’ 꿈. 「환상진화가」는 ‘지의류’인 ‘플랜’들이 인간의 세계를 잠식하는 이야기다. 소설 뒤에 부연 된 작가의 말에서, 은림 작가는 “우리가 종의 발달로 받아들이고 외워왔던 현생 인류의 계보는 절대적 진실이 아니며, 우리가 알아온 중에 가장 명명백백한 진실에 가까운 과학조차도 연구자들의 여러 가지 실수와 오류를 거쳐 추론된 과정이고 계속 변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언급한다.



“이끼는 곰팡이도 아니고 식물도 아니래요. 그 미묘한 선상에 있다고. 그 애매한 관계가 너무 좋더라고요. 엽록소가 있고 없고의 차이로 이끼와 곰팡이를 나누고, 어느 단계에서는 움직이는 미모사 같은 게 되고……. 그래서 일부는 동물이 되고 일부는 식물이 되고. 성서에 나오는 카인과 아벨 말이에요.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인류의 시발(始發) 같은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나는 식물, 하나는 동물이 되는 거죠. 늘 카인의 식물 제물을 내친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요. 나는 사람도 처음에는 식물이었을 거 같은 생각이 드는 거야. 처음으로 회귀하는 거죠, 그냥. 나무가 된다는 게 이질적인 게 아니고, 원래 태어났던 그 단계로 다시 가 버리는 거예요. 좀 더 원론적인, 내가 태어났던 원형으로 돌아가는 것.”

“그러면, 변형이 아니라 완결이네요.”

은림 작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래하는 숲』에는 인간이 식물의 형태로 변형하는 이미지가 상당수 나온다. 「할머니 나무」는 죽음 대신 나무로 변해 오래도록 생을 유지하는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이며, 「엄마꽃」은 엄마가 꽃이 되어버리는 이야기이다. 식물은 분명 생장하는 생물이지만 활동성이 부재하기에 사람들은 곧잘 그것을 망각한다. 은림의 이야기 속에서 이 생물들은 활동성이 ‘부재’하는 것이 아니라 활동성을 ‘갈무리’한다.


사춘기 때 나는 나무가 되는 것을 저주라고 생각했었다. 남들과 달라서 이상한 것, 나쁜 것이라고. 하지만 내가 생각한 대로 저주이자 ‘외로움을 잊는 징벌’이라면 나무가 되는 것보다 죽는 편이 훨씬 어울렸을 것이다. 죽음만이 온전히 세상 모든 것과 끊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무가 되는 것은 모든 기억이 사라지고, 귀가 멀고, 몸이 굳어버리는 것이 아니었다. 나무는 죽음처럼 멈추어 썩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소리 없는 느낌표로 살아 끊임없이 세상과 소통하는 거였다. 나는 어머니가 말씀하신 것을 이제야 이해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죽음을 잊으려는 생각에 나무가 된 것이 아니라 죽은 아버지와 나와 함께 살고 싶으셨기 때문에 나무가 된 것이다. 어머니는 정말 근사한 욕심쟁이였다.

―「할머니 나무」중



자신의 삶을 완전히 식물로 ‘갈무리’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완성하는 강한 여성들이 이 소설에는 등장했다. 「할머니 나무」의 서사에서 오직 여성들만이 나무가 될 수 있다는 것도 내게는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식물로 화하는 여성들은 「할머니 나무」뿐만이 아니라 「낙오자」에도 등장한다. 「낙오자」의 주인공 목련은 성공적인 번식을 해서 씨앗을 품을 수 있는 ‘딸’을 낳는 것이 목표이며,「노래하는 숲」의 식물들은 나비를 만나서 ‘번식’하는 것을 목표로 살아가고 있다. 나는 식물의 번식에 대한 질문을 했다. 처음 던진 질문과 마찬가지로 단순하면서도 명료하고 당혹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번식 싫어하는데! 아, 자손 남기는 거 싫어요!”


아.

그러고 보니 이 이야기들은 번식에 조금도 긍정적 이미지를 부여하고 있지 않았다. 「낙오자」는 체제에 의해 강제로 부여된 번식의 임무와, 사랑에 빠지면 낙오하게 된다는 규칙 사이에서 흔들리는 ‘목련’이라는 소녀의 고통스러운 성장(혹은 낙오)에 대한 이야기였다. 작가의 말은 “사랑이라는 헌신적 감정과 결혼이라는 계산적 제도 사이의 괴리”를 언급하고 있다.




“노래하는 숲의 꽃들이 가치 있다고 교육받는 건 오직 생식 행위와 그를 위한 부수적인 것들뿐이죠. 노래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스스로의 힘으로 걷는 건 절대 하면 안 되는 거죠. 토란은 나비를 기다리고 낙오자는 그 자들을 기다리고. 가장 큰 가치는 너희가 종을 위해서 번식을 해야 하므로 상대의 마음에 들기 위해 자신을 꾸며야 한다는 거. 그게 너무 역겨운 거예요. 우리에게 교육해주지 않는 것들, 압박받았던 것들에 대한 반항을 하고 싶었어요. 


새끼를 낳아야 한다는 당위 말고, 다른 자아실현.”



「노래하는 숲」의 토란은 식물 주제에 ‘노래’를 부른다. 동물도 쉽게 할 수 없는, 어쩌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행위. 토란도 마찬가지로 번식을 하기 위해 끊임없이 나비들을 기다려야 하는 입장에 처해 있다. 게다가 토란은 쉽게 ‘먹을 수 있는’ 식물이 아니던가. 통통한 생김새, 맛있는 음식. 토란과 미나리, 엉겅퀴와 도토리. 「노래하는 숲」에 나오는 식물들은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식물들이다. 특히 토란이 먹을 수 있는 식물이라는 점은 특별히 주목할 만했다.


“먹을 거라던가 친근한 식물들 얘기를 쓴 건 실용성이랑 맞닿아 있다고 봐야죠. 너무 멀리 있는, 거짓말 같은 얘기들이 아니라…… 히비스커스 같이 너무 멀리 있고 예쁜 꽃 말고, 당신이 먹는 미나리가 생각을 할 수도 있어, 밥상에 올라온 토란이 노래를 할 수도 있어.”


우리는 식물이 생장하는 생물이라는 것을 망각한다고 하였다. 의지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쉽게 그들을 입에 밀어 넣는다. 그다지 죄책감을 가지지 않고, 맛있는 음식으로서. 우리가 그들에게 빚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식물은 우리가, 좀 더 멀리 나가자면 고대로부터 인류가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다. 동물을 잡아먹기 위해서는 격렬한 저항을 마주해야 하지만, 식물을 앞에 두고서는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없다. 분명 인류는 수렵보다 채집에 익숙했고, 고정적인 식사를 하기 위해서 농작을 시작했다.




식물에게 의지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동물 역시 의지를 가지고 있다. 우리 옆에 있는 다른 인간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자극이 넘치는 세계 속에서 식물은커녕, 우리는 옆에 있는 인간이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하곤 한다.


“사회적으로 여성들이 억압받았던 걸 생각해 봐요. 활동성을 요구하지 않잖아요. 젊고 예쁘게 앉아있으면 되는 거고. 청소년들도 다 의지가 있잖아요? 이성에 대해 생각하고 섹스 생각도 하고. 하지만 그 모든 의지를 거세시키잖아요. 없는 셈 치는 거거든요. 14세기만 해도 동물은 의지가 없는 자연의 기계인형이라고 생각했대요. 사람은 자신보다 못하다고 치부하는 사람들에게서도 의지가 있다는 사실을 거세하려고 들어요.”



토란의 노래는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다. 화원의 주인인 아베는 그것을 평가 절하하며, 화원에서 걸어다닐 수 있는 식물은 매력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토란의 노래는 ‘쓸모없는 재주’다. 

남들과 다른 건 좋지 않아. 다른 꽃들을 봐라. 매혹적인 장미도 우아한 나리꽃도 노래 같은 건 안 해. 그 애들은 꽃잎을 가꾸고 더 향기로워지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모자랄 지경이지. 게다가 제일 중요한 나비들이 그걸 좋아할지 모르겠다. 곱고 향기롭고 꿀이 많은 건 확실히 좋아하지만. 그건 그냥 변변찮은 노래잖니. 시간도 많이 들고. 넌 아직 이파리도 부스스하고 이렇다 할 꽃대 하나 올리지 못했지? 거기에 더 신경 쓰는 편이 좋겠다. 미래를 위해 주어진 시간은 짧거든.

― 「노래하는 꽃」중


그러나 그 맛있고 단단하고 예쁜 알토란은 노래를 포기하지 않는다. 아이를 낳는 대신 엉겅퀴의 씨알들을 키우며 자신에게 주어진 엄혹한 운명을 끝내 의지적으로 버린다. 아무도 필요 없다고 말한 그 ‘노래’를 위해서. 토란은 아이를 낳지도 않았지만 숲에 노래를 전달함으로써 결국 세상의 모든 숲의 어머니가 된다. 생물학적 번식이 아니라 자신이 꿈꾸는 세계를 퍼뜨린 셈이다. 사실 문학이라는 것은 어떤 면에서 토란의 삶과 닮아 있다. 번식하고 자손을 낳아 종의 의무를 충실하게 이행하며, 그것을 위해 이윤을 축적하고 생을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별개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그 길을 쫓아가는 타나토스적 욕망. 은림의 소설 속에서 그 욕망은 소멸하지 않고 새로운 세계로 탄생했다.




“지금 쓰고 있는 장편은 나무가 세상인 이야기예요. 사람은 나무에서 하루씩 피고 지는 꽃 같은 목숨이고…. 이런 식으로 시작되는 이야기예요. 나무 잎맥의 모양이 전체 나무와 완전히 닮았다는 거 아세요? 프랙탈이라고 해요. 사람이 사는 세상도 다 비슷하지 않아요? 나무랑 어딘가는 닮아있어요.”


최소단위가 최대단위를 복사해내는 현상은 어디에서나 비슷하다. 인간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학교와 가정, 지역과 국가, 사회적 단위들. 작은 단위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은 큰 단위에서도 마찬가지로 복사된다. 우리는 그걸 종종 망각한 채, 주변의 토란과 미나리들이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는 착각을 하곤 한다.


“밤의 숲에 가만히 앉아서 나무를 보면요, 그 나뭇가지들이 다 움직이는 것 같아요.”


은림 작가는 자신은 그린 핑거가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분명 은림 작가의 엄지손가락의 작은 지문은 그녀가 그리는 세상 속의 커다란 잎맥들과 닮은 구석이 있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