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이 되어도 좋아
A가 일어났을 때 침대 옆자리에 커다란 곰이 자고 있었다. 눈을 비비며 다시 확인했지만 곰이 틀림없었다. 곰은 깨어날 기색이 없었다. A는 숨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왔다. 살금살금 옷을 입은 다음, 원룸 안을 살폈다.
B가 없었다. 손바닥만 한 원룸 현관에 신발이 그대로인 것을 보아서 밖으로 나가진 않았다. 곰이 B를 잡아먹었을지도 몰랐다. 코를 킁킁거렸지만 피 냄새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저 곰이 B를 잡아먹고 뼈를 으드득 으드득 씹어 먹고 피까지 핥아먹은 다음 환기를 시킬 정도로 철두철미한 놈일 수도 있었다. A는 싱크대에서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전부 꺼냈다. 머리에는 냄비를 쓰고 한 손에는 프라이팬, 다른 손에는 식칼을 들었다.
곰은 여전히 자고 있었다. 고민하다가 얼굴을 노리면 제 아무리 큰 짐승이라도 재간이 없을 것 같아서 곰의 코끝에 식칼을 들이대고 프라이팬을 치켜든 채로 녀석을 살폈다. 역시 핏자국이 없었다. 용의주도한 녀석. A는 새삼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때 곰이 눈을 뜨더니 A를 보았다.
“꾸엉?”
“너, 죽었어! B 어디 갔어!”
A는 프라이팬으로 곰의 이마를 내리쳤다. 곰은 커다란 앞발로 머리를 잡고 꾸엉꾸엉 울며 침대 반대편으로 도망쳤다. A는 식칼과 프라이팬을 휘두르며 곰을 쫓아 좁은 방 안을 빙글빙글 돌았다. 곰은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잘도 피해 다녔다. 마침내 지칠 대로 지친 A가 프라이팬과 식칼을 떨구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B를 내놓으란 말이야, 이 나쁜 곰아! 으허엉!”
A가 울자 곰은 당황한 듯 앞발을 내려다보더니 조심조심 다가가 A의 머리에 얹힌 냄비를 바닥에 내려놓고 토닥여주었다. 뜨거운 혓바닥으로 눈물도 닦아주었다. A가 코를 훌쩍이며 물었다.
“B?”
곰이 고개를 끄덕였다. A는 곰에게 달려들어 와앙,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왜 곰이 된 거야! 나쁜 놈아! 네가 널 잡아먹은 줄 알았잖아!”
곰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A의 등에 큰 앞발을 얹었다. 그 와중에 뒷발로 바닥에 떨어진 흉기들을 A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밀어버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는 용의주도한 곰이었다.
아침 뉴스는 전 국민의 약 1/5이 곰으로 변해버린 사건으로 시작했다. 그날로부터 약 한 달여, 브라운관 속에서만도 많은 일이 있었다. 매일 저녁 9시, 안경을 쓴 근엄한 표정의 곰이 단정한 투피스를 입은 여아나운서와 함께 뉴스를 진행했다. 아침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이 곰이 된 어머니와 이혼하겠다는 아버지 때문에 방황하며 마늘을 넣은 소주를 마셨다. 수목 사극에서 장희빈은 주상을 기다리며 궁녀들에게 두꺼운 앞발을 맡겨 손톱을 뭉툭하게 자르고 가방만 한 버선을 새로 짓게 시켰다. 주말 리얼리티 쇼에서 소녀걸스의 윤재가 그날 이후 방송에 출연하지 않는 제니에게 이빨이 주먹만 하다고 놀린 게 미안하다고 눈물을 글썽거리며 사과하는 영상편지를 보냈다. 한쪽 패널은 곰, 다른 쪽 패널은 사람으로 구성된 토론 프로그램에서 양측이 격론을 벌였다. 곰 측은 사람 사이즈로 제작된 키보드를 눌러 의견을 제시하다 여의치 않자 데스크를 물어뜯으며 온몸으로 항의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C는 이런 상황을 흥미진진하고 유쾌하게 지켜보았다. C는 스스로를 ‘사악한 대마법사’라고 칭했는데 그가 바로 곰 사태를 만들어낸 장본인이었다. 그는 인터넷 서핑을 통해 자신이 마법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25년간 여성을 가까이 하지 않고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다스리면 마법사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 마법을 쓰는지 알지 못했다. 인터넷에 포진한 다수의 마법사들도 자신들의 능력을 깨닫지 못하고 솔로인 신세를 한탄할 뿐이었다. 그러던 그의 눈에 “[펌] 사랑하는 사람이 곰이 된다면”이라는 포스팅이 들어왔다. C는 엮이고 엮인 인터넷 상의 글을 이리저리 클릭해보다 극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곰으로 시작해서 오늘이 세상의 마지막 날이라면, 으로 끝나는 질문지는 끝없는 닭살이 가득했다.
“젠장, 진짜로 곰이 되어봐라! 돈 있고 키 크고 잘생긴 놈 아니면 취급도 안 하면서 곰 따위랑 연애할 리가 없잖아!”
C의 절규에, 잠자고 있던 마법이 깨어났다. 마법은 충실하게 그의 원을 들어주기 위해 커플 중 한쪽을 곰으로 만들었다.
C는 곰 사태를 다룬 인터넷 기사에 익명으로 “커플만 곰이 되는 것 같지 않아요?”라는 댓글을 달아놓고 추이를 지켜보았다. 그 아래로 줄줄이 솔로임을 찬양하는 댓글이 이어졌고 커플부대를 나와 솔로부대로 옮겨오겠다는 댓글도 늘어갔다. 소녀걸스의 제니가 곰이 된 것을 제외하면 참으로 아름다운 세상이었다. 커플들이 연애질의 무상함을 깨닫고 있었다. 점차 인간 형태로 복귀하는 방송인이 늘어나는 것을 보아도 분명했다. 그는 계획도 없었던 주제에 음흉하게 입끝을 올리며 “모든 것은 계획대로.”라고 중얼거렸다. 안타깝게도 “안 되겠어! 이 녀석, 어떻게 하지 않으면!”을 외치며 사악한 대마법사를 쫓아오는 용사는 없었다.
A와 B는 잘 적응했다. B는 양복을 입는 것이 무리였기에 A의 손을 빌어 굵은 목에 넥타이를 매고 출근했다. 털가죽이 검은색이라 넥타이가 제법 어울렸다. 둘은 퇴근길에 만나 포장마차에서 떡볶이와 오뎅을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휴일에는 산으로 나갔다. B는 A를 둥기둥기 업고 잘도 돌아다녔다. 그래서인지 주변에서 곰이 되었던 사람들이 하나 둘, 원래대로 돌아오는데 B는 좀체 사람이 될 생각을 하지 않았다. A가 생마늘을 먹여보기도 하고 쑥을 갈아서 녹즙을 만들어보기도 했지만 B가 맛이 없는지 퉤퉤거리고 뱉어내는 바람에 포기했다. 어느 정도 좋아진 것도 있었다. B는 원래부터 과묵한 편이었는데 곰이 된 후, 인간으로써의 부끄러움이 소용없다고 생각했는지 애교가 늘었다. A는 실수로 걷어차도 움쩍도 않는 B의 두꺼운 털가죽이 마음에 들었다.
B가 곰이 된 이후 벌어진 가장 나쁜 일은 인간다큐 휴먼씨어터라는 방송에서 <곰이 되어도 좋아>라는 제목으로 다큐멘터리를 만들겠다고 한 것이었다. A는 방송에 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방송국 PD가 주변 사람들을 공략했다. 특히 직장상사가 회사 홍보가 될 거라며 등을 미는 데는 당할 재간이 없었다.
PD가 두 분의 생활에 누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감언이설을 늘어놓은 다음 날, 상당한 양의 방송장비가 A와 B의 원룸 안으로 들어왔다. PD는 B가 혹시나 사람으로 돌아가기 전에 양질의 방송분을 뽑아야 한다고 윗선을 설득해 최대한 많은 인력과 장비를 얻어낸 것이다. 화장실에 작가와 조연출이 자리를 잡았다. 카메라와 붐마이크를 든 촬영기사와 음향기사가 보조기사 넷과 위태위태하게 현관에 놓인 신발을 밟고 섰다. 반사판을 든 조명담당이 침대위에 올라갔다. 더 이상 사람이 들어갈 구석이 보이지 않자 화면에만 잡히지 않으면 된다며 PD가 화면 체크용 모니터와 전선을 끌고 옷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벌컥 벌컥 문을 열고 침대 위에 발이 잡힌다고 조명담당에게 호통을 쳤다.
A와 B는 카메라와 마이크가 있는 신발장을 향하되 침대는 나오지 않을 각도로 비뚜름하게 앉아 작가가 정해준 대로 하하호호 어색하게 웃었다. 자연스럽게 해달라는 주문이 이어질 때마다 B는 불안한 눈으로 A를 살폈다. A는 마음만 먹으면 프라이팬을 들고 곰에게도 달려들 수 있는 여자였다. B는 A의 얼굴이 찌푸려질 것 같은 기색이 보이면 애교를 떨거나 무릎에 눕히거나 머리에 앞발을 얹어 부볐다.
“바로 그거야!”
옷장 안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B는 A가 도끼눈을 뜨고 쳐다보자 딴청을 피웠다.
집 안을 다 찍자 PD는 둘을 끌고 선유도 공원에 갔다. 평소에 가는 곳이 아니라는 항의는 “거기가 그림이 좋아요”라는 한 마디로 묵살되었다. 선유도 공원에 도착해서는 촬영이 시작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전기를 끌어오고 카메라용 레일을 깔고 사람들을 통제하는 두어 시간 내내 벤치에 앉아 있던 A가 결국 폭발했다. A는 다짜고짜 B의 목에 매달렸다.
“튀자!”
A가 여차하면 목에 감은 팔에 인정사정없이 힘을 줄 태세였기에 B는 얌전히 따랐다. 결국 촬영팀이 야외촬영에서 얻은 것은 촬영과정을 기록하려고 조연출이 들고 있던 휴대용 캠코더에 남은 둘의 뒷모습뿐이었다.
C는 곰과 관련된 이야기를 찾아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가 인간다큐 휴먼씨어터의 예고편을 보았다. 벚꽃잎이 흩날리는 가운데 핑크빛 기운을 뿌리며 질주하는 곰의 엉덩이가 보였다. 그 위에 여자가 앉아있었다. <곰이 되어도 좋아―사랑을 위해 세상 끝까지 도망치다>라는 제목이 떠올랐다. ㅇ이 하트모양으로 반짝거렸다. C는 어젯밤에 먹었던 컵라면이 목구멍까지 기어 나오려는 것을 느끼고 입을 틀어막았다. 정녕 한쪽을 곰으로 만들어도 소용없는 커플이 있었단 말인가! 용서할 수 없었다.
C는 A와 B를 만나러 가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인터넷에서 둘의 정보를 모았다. 친구에게서 오토바이 헬멧과 구명조끼를 빌렸다. 사악한 대마법사였지만 커다란 곰과 맨 몸으로 맞서기는 무서웠다. 그는 오토바이 헬멧과 구명조끼를 착용하고 빨래건조대에서 플라스틱 봉을 하나 무기삼아 빼들고 A와 B를 찾아갔다.
어둑해진 거리, 떡볶이 포장마차 앞에서 A와 B를 마주친 C는 당혹했다. 둘의 뒤에 촬영 기자재를 끌고 열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따라다니고 있었다. 예고편은 어찌 만들어 내보냈지만 둘이 열심히 도망 다니는 통에 방송분이 완성되지 않은 것이다. 그나마 떡볶이를 먹겠다고 A와 B가 멈춰 서지 않았다면 최소 삼십 분 내내 달리는 곰 궁둥이 특집을 방송해야 할 상황이었다.
C는 마음을 다잡았다. 매스컴 정도에 약해지면 안 된다. 그는 사악한 대마법사니까! C는 헬멧의 유리를 내리고 플라스틱 봉을 앞으로 내밀고 포장마차에 접근했다. 시뻘건 떡볶이 국물에 입가의 털을 흉폭하게 버무린 곰, B가 C를 돌아보았다. A도 C를 보았다.
“거기, 곰!”
C가 외쳤다. B가 앞발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래!”
B가 떡볶이 포장마차를 가리듯 앞으로 나와 뒷발로 일어섰다. C는 플라스틱 봉을 두 손으로 고쳐 쥐었다. 차라리 야구방망이나 전기톱을 빌려올 걸, 후회스러웠다. 곰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
“인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나? 나는 방법을 알고 있다.”
C의 말에 A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어요?”
“바로 내가 커플 중 한쪽을 곰으로 만든 사악한 대마법사다! 내 말을 믿어라! 당장 마음을 돌려 저 여자와 헤어지면 원래대로 인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순간 C는 B가 움찔하며 조금 물러서는 것을 느꼈다. 자신에게 압도당한 것인가 싶어 헬멧 안쪽으로 입이 벌어지는 순간, A가 떡볶이를 꽂은 포크를 휘두르며 화를 냈다.
“지금 B가 곰이 된 게 나 때문이라는 거예요?!”
“음, 따지다보면 그렇게 되나……. 중요한 건 커플은 안 된다는 거다! 솔로 만세!”
C의 외침에 촬영팀이 박수를 쳤다.
“커플을 따라 뛰는 것은 지겹다! 솔로를 취재하자!”
내내 카메라를 메고 있던 촬영기사가 외쳤다. 휘하 기사들이 연호했다.
“솔로를 취재하자!”
PD가 대본을 말아 쥐고 목소리를 높였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우리가 하려는 건 혼탁한 세상 속에서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사랑으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거야!”
PD가 C를 가리켰다.
“바로 저런 사람들에게!”
“뭐?!”
C는 목이 시뻘게질 정도로 당황했다. A가 코웃음쳤다.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세상의 모든 남자가 곰이 된다고 해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남의 연애에 이러쿵저러쿵 해대는 저런 사람은 애인 안 생겨요.”
C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세상의 모든 남자가 곰이 되어도 안 된단 말인가. 자신은 영원히 대마법사인 채로 살아야 한단 말인가. 아니다, 솔로부대 만세, 만세, 만만…… C는 울컥 밀려드는 서러움에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의 마음속에서 분노가 힘을 잃자 마법이 사그라졌다. B가 중얼거렸다.
“우와, 잔인해.”
A가 B를 돌아보았다. B는 목에 넥타이를 맨 채 맨발로 서 있었다.
결국, 인간다큐 휴먼씨어터 <곰이 되어도 좋아>는 선정성으로 인해 방송을 타지 못했다. 그러나 사랑은 사악한 대마법사를 물리쳤다. 아마도.
가는달
침묵을 찾아 떠난 한 악사의 고뇌와 절망, 깨달음을 그린 동양풍 판타지 「나하의 거울」로 제1회 이매진 단편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이후 이매진에 작은 소녀의 이야기인 「작은 나닌」을 게재하기도 했다.
거울 2호에 「윤회의 끝」을 발표하며 시간의 잔상 필진으로 합류했으며, 「나하의 거울」 「지구에 돌아오다」 「우주화」 「K씨의 개인사정으로 이번 호의 연재는 쉽니다」 「누구의 포크인가」등을 게재하며 활동 중이다.
길고 진지한 이야기 외에도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엽편에 강한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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