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밸런타인데이



그는 어린애처럼 앉아서 모래성을 쌓고 있는 아내가 어째서 마녀라고 불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내는 여느 사람처럼 남과 다른 점이 몇 가지 있을 뿐이었다. 지금처럼 찬바람이 몰아치는 1월에 얇은 면 옷을 입어도 추위를 타지 않았고 감정에 따라 머리카락 빛깔이 변했으며 늙지 않았다. 그는 남과 다른 점을 과시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유독 아내를 두고 수군대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는 아내가 남과 다른 점을, 그 특별함을 사랑했다.

“추워.”

아내인 카리나와 달리 추위를 몹시 타는 그가 발을 동동 구르면서 말했다. 

카리나는 미완성으로 남게 된 모래성을 아쉽게 바라보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양말을 두 겹이나 신고도 시린 발을 동동 구르는 그가 안쓰러워진 모양이었다. 그는 해변을 등지고 다가오는 카리나를 향해 새파래진 입술로 웃었다. 파도가 카리나에게 다가오다가 끝내 닿지 못하고 물러났다.

“일월이 끝났어.”

카리나가 맥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모래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함께 걷던 그는 건성으로 입소리를 내었다. 카리나는 언제나 1월이 끝나는 것을 아쉬워했다. 1월이 끝나면 정신없이 바빠지기 때문이었다. 밸런타인데이를 위한 초콜릿 주문이 이미 잔뜩 밀려 있었다. 그는 부엌에 덕지덕지 붙은 주문서를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지금쯤 난쟁이들이 초콜릿을 만들 솥을 가져다 놓았을 것이고 그는 카리나가 만들 초콜릿에 들어갈 약초를 구해 와야 했다. 괴상한 약초를 초콜릿에 넣기가 찜찜하다고 불평하기는  오래전에 그만두었다. 카리나와 함께 밸런타인데이를 열 번 넘게 보냈지만 초콜릿을 먹고 탈이 난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초콜릿의 인기는 점점 높아지기만 했다.

파도가 그녀의 발치까지 닿았다가 물러서면서 애절한 소리를 냈다. 그는 그 소리를 들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등 뒤로 점점이 이어지는 발자국의 끝엔 반쯤 쌓인 모래성이 아직도 그대로 놓여 있었다.

“성 모양 초콜릿을 만들어주면 어때?”

문득 그가 물었다.

“누구에게?”

카리나가 반문했다.

“그야.”

조금 무안해진 그가 얼굴을 붉혔다.

“나에게.”

그 말을 들은 카리나가 소리 내어 웃으며 앞으로 뛰어나갔다. 그는 요정처럼 춤추는 카리나를 꿈꾸듯이 바라보았다. 시시각각 다른 빛으로 변하던 카리나의 머리카락이 태양 빛으로 물들어갔다.

“카리나는 아무에게나 초콜릿을 만들어주지 않아.”

카리나가 허리에 손을 얹고 말했다.

“내가 아무나야?”

카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카리나를 잡으려고 애쓰다가 애절하게 물러나는 파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날 사랑하지 않아?”

카리나는 부드럽게 웃을 뿐이었다. 아마 이번 밸런타인데이에도 질문의 답을 듣지 못할 것이다. 마음이 파도처럼 하얗게 부서져 내렸다. 


1월이 끝나고 2월의 첫날이 다가왔다. 초콜릿을 주문하기 위해 집 앞에 늘어선 긴 행렬은 올해도 매일매일 이어질 험난한 초콜릿 만들기를 예고했다. 카리나를 마녀라고 부르며 가까이 하지 않던 여자들조차도 밸런타인데이 직전에는 카리나에게 호의적이었다. 

책상 앞에 앉은 카리나의 머리카락은 시시각각 색깔이 변했다. 기이한 머리카락을 바람에 흩날리며 사악하게 웃는 모습이 영락없는 마녀였다. 그는 잔뜩 거드름을 피우는 카리나에게 초콜릿 주문서를 몽땅 가져다주었다. 카리나는 으스대며 안경을 끼고는 주문서를 살피기 시작했다. 안경 때문에 우스꽝스러운 마녀처럼 보인다고 몇 번 잔소리를 했지만 주문서를 읽을 때마다 안경 쓰는 습관은 고쳐지지 않았다. 카리나는 안경을 쓰면 어떤 주문을 받고 어떤 주문을 거절할지 매우 객관적으로 판단하게 된다는 이유를 댔다.

말하자면 안경이 마법을 부리는 거야.

카리나가 딱 잘라 말했다. 그 말을 믿기는 어려웠지만 안경을 낀 카리나는 평소보다 훨씬 더 신중하고 꼼꼼해졌다.

“사하레나.”

초콜릿을 주문한 여자의 이름이 불렸다. 평소에 카리나를 마녀라고 부르며 나쁜 소문을 퍼트리는 여자였다. 카리나는 복수라도 하는 것처럼 한참 동안 뜸을 들이며 여자를 애태우다가 입을 열었다.

“사 년 동안 끈질기게 주문을 냈군요. 올해는 주문을 받겠어요. 사 년간이나 주문을 거절했지만, 사과하진 않겠어요. 내가 만드는 초콜릿은 완벽한 조건하에서만 효과를 발휘해요. 조건이 맞을 때까진 주문을 받을 수 없어요.”

카리나가 쌀쌀맞게 말한 뒤에 배달까지 부탁할 것인지 물었다. 여자가 결정하기를 기다리는 카리나의 머리카락은 사랑스럽고도 짓궂어 보이는 색으로 빛났다. 다른 사람들은 시시각각 색깔이 변하는 머리카락을 두려워했지만 남편인 그는 그것을 보고 카리나의 기분을 알았다. 포도주 빛이 도는 옅은 분홍빛은 슬픔이나 애절함을 의미했고, 붉은색은 흥분, 검은색은 잔인함, 태양 빛은 즐거움, 석양과도 같은 장밋빛은 사랑스러운 감정을 뜻했다. 

사하레나의 주문을 받아들인 카리나의 머리카락이 장밋빛으로 빛났다.

“어따, 초콜릿을 받을 남자가 참 행복하겠소.”

사랑스럽게 여자를 바라보는 카리나의 목소리에 장난기가 돌았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모습이었다. 

“할멈, 초콜릿에 눈물을 좀 섞어줄까? 싫어? 그러면 독을 조금 넣을까? 먹고 나면 제법 괴로울 거야. 어때? 지금까지 할아범이 속 많이 썩였잖아.”

할머니를 다음 손님으로 맞은 카리나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처음 보는 손님의 사연을 어떻게 그토록 상세히 아는지는 누구도 몰랐다. 그러나 다들 그러려니 했다. 마녀는 남들과 달라도 무척 다른 법이었다.

다음 손님은 말이 많고 깐깐한 여자였다. 카리나는 손님의 까다로운 요구를 맞추기 위해 필요한 재료를 주문서 귀퉁이에 적었다. 도마뱀의 꼬리, 길고 괴상한 이름을 가진 풀, 모기 눈알. 하나같이 야릇한 재료를 구하는 일은 언제나 남편의 차지였다. 그래서 그는 카리나가 초콜릿에 들어갈 재료를 손님에게 제안을 할 때마다 제발 손님들이 거절하길 바랐다. 그러나 여자들은 항상 더 주문하면 더 주문했지 제안을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아하! 복수의 초콜릿!”

마침내 그가 가장 싫어하는 단어, 복수가 등장했다. 그는 검은색과 붉은색을 오가며 어지럽게 빛나는 카리나의 머리카락을 보면서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카리나는 복수의 초콜릿 만들기를 가장 좋아했다. 

그는 복수의 초콜릿에 들어가는 재료가 끔찍이 싫었다. 특히 ‘무엇이든 녹여버리는 늪의 물’은 최악이었다. 늪의 물을 담으면서 몇 번이나 손을 데었던 그는 아직도 아물지 않은 화상 자국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카리나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사지를 찢어버리는 독을 넣자!”

검은색으로 빛나는 머리카락을 송곳처럼 날카롭게 세우고 송곳니를 드러낸 카리나가 야수처럼 웃었다.

“숨 막히는 고통을 백 개쯤 넣을까?”

“아니요.”

손님이 대답했다. 그는 안심하고 싶었지만 ‘복수의 초콜릿’을 주문하는 손님의 대답에 마음을 놓기는 일렀다.

“만 개쯤 넣어주세요. 아니, 아니에요. 돈을 더 드릴 테니 오만 개로 해요.”

“아가씨의 아름다운 두 눈을 받고 육만 개로 하지. 만 개는 내 서비스야.”

주문이 이어질수록 카리나의 머리카락이 훨씬 더 미묘하고 복잡한 빛을 발했다. 주문을 받으면서 점점 흥이 오르면 카리나의 인심도 후해졌다. 그래서 여자들은 앞줄보다도 뒷줄을 차지하려고 다투었다. 

그러나 흥이 한창 오른 카리나도 거절해야 할 주문을 받으면 냉정해졌다. 공중으로 뻗치던 머리카락은 순식간에 어깨 아래로 떨어지며 회색빛으로 변했고, 카리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이 남자는 아직 널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어.”

카리나는 냉정하게 말하면서 주문서를 찢는다. 주문서를 찢지 않고 몇 년 뒤로 주문을 미루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그리 많진 않았다. 

주문을 처리하는 데 꼬박 하루가 흐르고 나면 카리나는 초콜릿을 솥에 넣고 뭉글뭉글하게 녹였다. 그는 불을 일정한 온도로 유지하면서, 아내가 높은 의자에 앉아 주걱으로 솥을 저으며 괴상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름가량 지켜보았다.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아내의 머리카락은 시시각각 변하는 감정을 따라 여러 색으로 빛났다. 그는 그것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면서 아내와의 아련한 추억에 잠겨들거나 장작으로 솥을 두들겨서 아내가 부르는 노래의 박자를 맞추었다. 그러면 태양 빛으로 밝게 빛나는 카리나의 머리카락이 남편의 뺨을 섬세하게 쓰다듬다가 그를 휘감아 침대로 데려갔다.

그는 마법에 걸린 주걱이 혼자 솥을 젓는 소리를 들으며 초콜릿보다 달콤한 카리나의 목덜미를 핥았다. 그럴 때면 창 밖에서 파도의 행복한 노랫소리가 밀려들었고 그는 두 사람이 해변에 남기고 온 발자국이 춤을 추면서 복잡하게 배열되는 소리를 들었다.


행복은 초콜릿을 굳히는 날이 다가올수록 점점 옅어졌다. 카리나는 초콜릿이 입안에서 녹을 온도를 미묘하게 조절하는 작업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무심한 갈색 빛을 내며 뾰족하게 위로 뻗은 머리카락은 결코 아래로 내려오는 법이 없었다.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사랑을 갈구하는 그를 밀어내면서 카리나는 해마다 같은 이야기를 했다.

“이 일은 정말 중요해. 초콜릿이 입안에서 녹는 온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 온도를 너무 낮게 맞추면 상대의 마음을 녹일 수 없고, 온도가 너무 높으면 상대방의 마음이 녹다 못해 아예 없어져버려. 사람들이 대마녀라고 부르는 내가 망신당하는 일이 생기는 거야. 그런데도 계속 방해할 거야?”

카리나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퉁명스러움에서마저 사랑을 느끼는 그는 방해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면 카리나는 머리카락을 푸르게 빛내면서 화가 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이내 장밋빛으로 변한 머리카락은 그의 각진 턱을 쓰다듬으면서 그를 다시 침대로 데려갔다. 침대 위에서 초콜릿보다 달콤한 사랑이 끝나면 카리나는 자신을 방해한 그에게 복수라도 하는 것처럼 투명한 공기방울을 만들어 허공에 띄웠다. 그는 매번 이런 밤이 싫었다.

“내가 왜 초콜릿을 만들기 시작했는지 이야기했어?”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애써 들었다고 대꾸해봤자 카리나는 기어코 또 그 이야기를 한다.  그는 괴로워하며 다시 듣는 수밖에 없었다.

“저 소년 때문이었어.”

카리나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공기방울 안에는 작은 숲이 있고, 숲 속의 외딴 집엔 한 소년이 살았다.

“지금 봐도 너무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을 모르겠어. 그런데…….”

“그런데, 저기 혼자 사는 소년은 밸런타인데이에 자신을 사랑하는 여자에게서 초콜릿을 선물 받는 것이 소원이었겠지.”

무심한 카리나가 미워진 그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이야기했어? 하지만 그래도 들어!”

“좋아, 들을게. 하지만 소년에게 선물할 초콜릿을 만들려고 실험했던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아. 특히 시험 삼아 만든 초콜릿을 받은 남자들이 끔찍한 일을 당한 부분은 건너뛰면 좋겠어.”

“그 부분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해! 초콜릿이 입안에서 녹는 온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된 대목이니까.”

“아무것도 모르고 그 초콜릿을 사서 남자에게 선물했던 여자들이 당신을 가만뒀다니 정말 대단해.”

그의 말을 들은 카리나가 싸늘하게 웃었다.

“가만 안 두기는. 한꺼번에 몰려와서 덤비기에 한 명은 개구리로, 한 명은 벼룩으로 만들었고 또 한 명은…….”

“카리나.”

질책이 담긴 목소리로 그가 이름을 불렀다. 카리나는 말을 멈추고 어깨를 으쓱했다.

“전부 그 여자들 잘못이야. 미적지근한 마음과 지나친 열정을 초콜릿에 담아달라고 내게 강요했으니까. 미적지근하고 딱딱한 초콜릿을 씹다가 이빨이 깨진 일이나 열정이 펄펄 끓는 초콜릿을 먹다가 머리가 녹아버린 일이 어째서 내 탓이라는 거야!”

“카리나!”

그가 그만하라는 뜻으로 이름을 부르면 카리나는 사악하게 웃은 뒤에 남편에게 입을 맞추었다. 달콤하고 긴 키스가 끝난 뒤에도 공기방울은 사라지지 않았다.

늙지 않는 아내의 긴 사랑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도 언제 끝날지도 그는 알지 못했다. 그저 카리나가 올해도 소년을 위한 초콜릿을 몰래 만들리라 짐작할 뿐이었다. 그는 공기방울을 바라보는 카리나의 머리카락이 깊이를 모를 사랑의 빛으로 물들며 반짝이는 것을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이 애는 행복했을까?”

조용한 목소리로 묻는 카리나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는 투명한 별빛으로 물들어가는 카리나가 사라질 것만 같아서 힘껏 끌어안았다.

“혼자 쓸쓸하게 빈집에서 죽어버리진 않았겠지?”

그의 품속에서 카리나가 쓸쓸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상냥하게 카리나의 이마를 쓰다듬다가 공기방울을 터트려버렸다.

훌쩍이는 카리나를 다시 침대에 누인 그는 카리나의 몸에서 파도의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결코 닿지 못할 그녀의 마음을 향하여 밀려갔다 물러나기를 반복하는 파도처럼 일렁였다. 눈을 감고 파도에 몸을 내맡기는 카리나의 머리카락은 장밋빛 석양처럼 그를 비추었지만 결코 깊이를 알 수 없는 별빛으로 빛나지는 않았다. 

아내의 빛바랜,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은 사랑 이야기를 들은 다음 날은 밸런타인데이였다. 그는 아침에 우중충한 파도에 젖은 기분으로 일어나 카리나를 배웅했다. 카리나는 초콜릿을 배달하기 위해 빗자루를 타고 집을 떠났다.

그는 덩그러니 빈 솥 앞에 한참 동안 앉았다가 일어나 책상 서랍을 열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던, 사랑하는 아내의 비밀 공간이 거기에 있었다. 매년 거기에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기를 얼마나 그가 바라는지 카리나는 몰랐다. 땀을 뻘뻘 흘리며 굵은 팔뚝을 좁은 공간으로 밀어 넣은 그의 손끝에 묵직한 상자가 닿았다. 움직임을 멈춘 그의 이마에서 미끄러진 땀방울이 눈꺼풀에 매달렸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카리나는 정성들여 만든 초콜릿을 상자에 넣은 뒤에 수줍은 소녀처럼 아무도 모르는 이곳에 감췄을 것이다. 상자에서는 파도 냄새가 났다. 그는 아주 오래전에도 어느 소녀의 초콜릿 상자를 쥐고 이렇게 서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성들여 만든 초콜릿을 사랑하는 소년에게 전해주지 못해서 엉엉 울던 소녀를 만난 적이 있는 듯했다. 

사실 소녀에게서 초콜릿을 받고 싶었던 사람은 그였다. 하지만 애써 질투를 감추고 소녀 대신 소년에게 초콜릿을 전해 준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는지 아니면 서로를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 끝냈는지 정확하게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던 듯도 하고 그저 그렇게 끝났던 듯도 했다. 그는 그냥 그러려니 했다. 나이가 들면서 기억이 많아지면 자신에게 정말 중요한 기억만 선명하게 남는 법이었다. 

그는 화사하게 포장된 초콜릿 상자를 다시 쓰다듬었다. 결코 잡히지 않을 소년을 향해 밀려가는 카리나의 마음이 손아래에서 파도처럼 일렁였다. 그는 그런 파도를 갈망하는 소년이었던 적이 있었다. 사랑하는 여자가 주는 밸런타인데이 초콜릿을 받고 싶었던 외딴 방의 소년은 먼 과거에 두고 온 그의 초상과 닮아 있었다. 

질투를 거두자 소년이 가여웠다. 밸런타인데이는 해마다 돌아오지만 사랑엔 기약이 없다. 카리나는 오랫동안 소년을 위해 초콜릿을 만들어왔지만 내년에도 그럴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는 카리나와 외로운 소년을 위해서 다시 한 번 배달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카리나의 곁에서 귓등으로 배운 어설픈 주문을 초콜릿 상자에 대고 외웠다. 그리고 어딘가로 향하는 상자를 따라 걸었다.

그는 걸어가는 동안, 소년을 잊은 카리나의 머리카락이 별빛으로 물들면서 부드럽게 자신의 턱을 쓰다듬는 꿈을 꾸었다. 그날이 오면 카리나는 소년을 위해 만든 초콜릿보다 훨씬 더 맛있고 아름다운 초콜릿을 그에게 선물할 것이고, 그는 둘이서 해변에 남긴 발자국이 어지럽게 흩어지며 춤을 추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상자를 따라 얕은 실개울을 건넌 그는 마침내 공기방울 속에 있던 낡고 작은 외딴 집에 이르렀다. 외딴 집의 굴뚝은 허물어진 지 오래였고 마당에는 시커멓게 변한 개의 시체가 있었다. 깊은 산속에서 쓸쓸히 홀로 쇠락한 외딴 집 안에는 텅 빈 눈으로 빈 집을 지키는 하얀 해골만이 있었다. 그는 카리나의 초콜릿 상자를 허망하게 내려다보았다.

소년은 어른이 되었고 빈집에서 혼자 쓸쓸히 죽었다. 세상일에 훤한 카리나가 그 사실을 몰랐을 리 없었다. 아마 믿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우울해진 그는 빈집을 등지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연적은 시간을 잃어버린 채 추억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결코 늙지도 변하지도 않은 모습으로 영원을 살아간다. 그는 카리나에게 영원한 소년으로 남아버린 연적을 질투했다.

그러나 그는 죽은 이에게 예의를 다하기 위해 초콜릿 상자를 열고 해골 옆에 놓았다. 그리고 까맣게 빛나는 초콜릿을 해골의 입에 하나 물리고, 자신도 하나 물었다. 초콜릿은 한 사람을 향한 마음으로 만들어진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이 그 마음을 입안에 머금을 때에만 녹아내렸다. 혹시나 카리나가 초콜릿에 담은 마음을 느낄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초콜릿은 나무껍질처럼 딱딱하고 아무 맛도 없었다. 잠시나마 자신의 모습처럼 여겼던 소년의 해골이 텅 빈 눈으로 그를 마주했다.

그는 부드러운 초콜릿을 감싼 딱딱한 껍질을 억지로 깨물었다. 부서진 껍질 안에서 뜨거운 카리나의 마음이 흘러나왔다. 그제야 그는 여전히 소년이 자신의 초상임을 알았다. 그 언젠가 그도 소년처럼 외딴 집에 홀로 앉아 자신을 몹시 사랑해줄 단 한 사람을 기다리며 조금씩 나이를 먹어갔던 듯했다. 육신이 썩고 하얀 해골이 드러난 후에 영원이 되어버린 외로움 속에서도 계속 기다렸던 듯 했다. 그는 그제야 소년을 위해 초콜릿을 만들고도 전해주지 못했던 소녀의 두려움과 마녀의 비밀을 이해했다. 카리나가 사랑했던 소년은 바로 그였다. 

초콜릿에서 흘러나온 뜨거운 마음은 무서운 속도로 심장에 이르렀다. 아내의 마법은 끝났다. 그는 천천히 녹아내리면서 외로웠던 자신의 죽음을 잊었다. 그리고 카리나가 초콜릿 대신 주었던 영원이 찰나로 돌아가는 순간, 마녀인 아내의 머리카락이 깊이를 알 수 없는 별빛으로 물들며 자신의 턱을 간질임을 느꼈다. 그때, 해변에 놓인 두 발자국은 하얗게 밀려온 파도에 지워졌고 그는 태양 아래 놓였던 미완성인 모래성이 우수수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終




김주영

1997년 하이텔 과학소설 동호회에서 옴니버스 장편소설 『나호 이야기』를 연재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하이텔 과학소설동호회 6대 시삽을 역임한 바 있다. 제2회 황금드래곤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주요 작품에 『그의 이름은 나호라 한다』(2000), 『열 번째 세계』(2004), 『이카, 루즈』(2008), 『여우와 둔갑설계도』(2009) 등이 있으며, 단편집 『노래하는 늪』(2005)이 있다. 

또한 공동작품집 『한국환상문학단편선』(2008), 『U-ROBOT』(2008), 『한국환상문학단편선2』(2009)에 단편을 수록하였으며, 장르문학 전문잡지 《판타스틱》이 폐간할 때까지 장편 「용선 파미르」를 연재하였다. 웹진 거울의 편집진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필진으로 활동하고 있다. 단편집 『보름달 징크스』가 곧 출간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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