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즈윈, 다른, 뜨인돌, 모요사, 미래인, 바다출판사, 보물창고, 비룡소, 솟을북(한국문학사), 사계절, 우리같이, 웅진주니어, 청어람, 탐, 푸른책들.
이 출판사들의 공통점은 최근 몇 년 사이에 SF/판타지소설을 한 권 이상 낸 적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상당수의 SF/판타지 팬들은 이 출판사들의 이름을 대부분 스쳐 지나가듯 들어보았거나 ‘아동청소년’ 소설을 내는 출판사라고 인식하고 굳이 찾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장르소설 전문 출판사(이하 장르 출판사)’로 알려진 곳에서 낸 작품들보다 더 마음을 흔들어놓은 작품들을 내준 고마운 출판사들이다.
이미 대형 출판사를 비롯, 수많은 출판사들이 장르소설을 출간하는 시대다. 이제 장르소설은 ‘장르 출판사’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숨어 있던 명작들을 장르 출판사에서 하나씩 발굴해내던 시기는 지난 지 오래다. 화제가 될 법한 장르소설은 심지어 본국에서 출간되기도 전에 영화화 계약과 번역 계약이 성사되기도 한다. 예전처럼 몇몇 장르 출판사의 홍보만 바라보다보면 좋은 작품을 상당수 놓치고 만다.
블랙 주스, 사계절, 2012
작년(2012년)에 나는 사계절에서 출간한 『블랙 주스』를 읽고 두 가지 충격을 받았다. 첫째는 이렇게 수상경력이 화려한 화제작이 너무 조용하게 출간됐다는 것, 둘째는 나오자마자 화제가 될 만한 책이었음에도 청소년문학계는 물론 장르 팬덤 내에서도 거의 언급을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외국에서 이 작품은 절대로 장르 팬덤과 동떨어진 작품이 아니다. 작가인 마고 래너건은 2009년에 제프리 포드와 함께 세계환상문학상을 공동수상하기도 했고, 수록작 「노래하며 누나를 내려 보내다」는 세계환상문학상과 디트머상(『쿼런틴』이 수상하기도 했던 호주의 SF/판타지문학상이다)을 수상했으며 휴고상, 네뷸러상, 스터전상 후보에 올랐다. 하지만 이 책은 우리나라의 장르소설 애호가에게 거의 언급 대상이 되지 못했다.
바벨의 도서관 세계문학 컬렉션의 일부
혹시 『블랙 주스』가 장르소설이 아니라 ‘청소년문학’이기 때문에 벌어진 일일까? 그렇다면 다른 예를 들어보자. 장르소설 팬치고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라는 이름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바다출판사에서 출간한 ‘바벨의 도서관’ 세계문학 컬렉션은 바로 그 보르헤스가 직접 고른 세계문학전집이자 ‘19~20세기 장르의 태동’ 시기에 등장한 ‘보르헤스풍’ 작품들을 모아놓은 기획이다. 유명 작가의 환상문학 작품들과 함께 힌턴, 릴아당, 던세이니, 메켄, 사키 등 SF/호러 계열 작가들의 (앤솔러지가 아닌) 제대로 된 작가별 단편집을 거의 최초로 소개하기도 했다. 힌턴의 「평면세계」 같은 고전 SF는 앨런 무어의 『프롬 헬』에서도 인용됐고, 메켄의 「불타는 피라미드」나 사키의 「토버모리」와 같은 고전 공포소설은 H. P. 러브크래프트의 세계관에 큰 영향을 끼치는 등 수록작들이 하나같이 장르소설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만한 작품들로 엄선된 시리즈다. 하지만 ‘바벨의도서관’은 SF/판타지/호러 팬들에게 거의 주목받지 못한 채 저조한 판매를 보였다. 심지어 ‘세계문학전집’으로 출간하면서 각 작품에 대한 보르헤스 자신의 ‘논평’까지 담아내며 그동안의 비평적 갈증까지 채우는 기획물이었음에도 외면받은 것이다.
이렇듯, 장르소설이지만 ‘장르 출판사’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장르 팬덤 내에서 언급도 되지 않고 적극적으로 평가될 기회도 얻지 못한 소설들의 예시를 들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 그리고 이런 소설들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무엇이 이런 상황을 만든 걸까. 장르 출판사에서 나오는 작품만으로도 충분하니까, 바깥에서 나온 책들까지 챙겨볼 필요도 없고 그럴 시간도 없으니까, 이대로도 괜찮은 걸까?
나는 몇 년 전부터 출판사나 서점에서 제시하는 카테고리 분류만을 따라가고, 출판사와 서점의 홍보와 이벤트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팬덤의 경향에 대해 지적해왔다. 뭐, 독자들이 알아서 작은 출판사의 장르소설들을 일일이 찾아 읽기에는 신간이 너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장르 출판사’ 바깥에서 출간되어 놓치기 쉬운 책을 재조명해줄 ‘체계’가 있다면 어떨까. 비록 지금은 출판사와 인터넷 서점 들이 정보를 거의 독점하고 있지만, 장르소설 팬들에게 그럴 만한 의지가 있다면 스스로 시야를 확장하고 새로운 작가와 출판사와 번역자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된다면, 출판사들도 지금처럼 판매량이 보장되는 유명 작가의 신간을 계약하려고 지나치게 많은 돈을 투자해가며 경쟁하기보다, 직접 작품을 선별하고 발굴하고 작가를 키워 나가는 방향을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출판사나 서점이 제시하는 신간목록에만 눈길을 주는 것이 아니라 좋은 작품, 의미 있는 작품이 예리한 독자의 눈에 발견되고 널리 알려지면서 잘 팔릴 수 있는 기회가 지속적으로 주어진다면, 그리고 그러한 기회가 장르 커뮤니티의 영향력에 힘입어 넓어진다면 어떨까. 출판사나 대형유통자본의 손에서 벗어나 세계 고금의 장르소설들을 그들의 필터링 없이 보면서 더 큰 세계와 조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장르 팬들의 자발적인 노력이 있어야 잘 안 팔릴 것 같다는 마케팅적 ‘감’ 때문에 아예 소개될 기회조차 잡지 못하는, 진짜 재기발랄한 작품들(『블랙 주스』 같은)을 비로소 만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바로 이런 노력이 장르 커뮤니티를 만들어내고 장르 커뮤니티의 영향력을 키우는 원동력이며 장르 팬들에게 진정한 다양성을 맛볼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러면 장르 커뮤니티의 영향력이 커지기 위해서는 지금 시점에서 과연 무엇이 필요한가.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바로 장르소설의 팬들이 각자 도서목록과 작품의 감상을 작성하고 공유하며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장소’다. 그리고 그 ‘장소’는 장르소설을 즐기는 개개의 사람이 단순히 책을 구매하는 ‘소비자’가 아니라 취향을 쌓아가는 팬으로써 공동체를 이루어야만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 익숙한 작가와 출판사를 따라가는 ‘습관’에서 벗어나면, 출판자본이 제공하는 정보를 넘어서 팬 스스로 다양한 장르소설을 찾아볼 수 있게 된다. 자본의 필요가 아니라 공동체 스스로 역사와 목록을 정리하고 재조명하는 작업이 이뤄질 때, 또 그렇게 쌓인 노력이 후세대에게 전달될 때 장르소설은 구매와 소비를 넘어 문화로 홀로설 수 있을 것이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남기는 한두 줄의 짧은 평이나 블로그의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들도 그 개인에게는 의미 있는 흔적이겠지만, 정말로 장르라는 취향이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음을 알리는 것은 결국 커뮤니티 문화에서 시작한다는 게 내 믿음이다. 그 책이 ‘많이 팔려서’도, ‘작가가 유명해서’도 아니라, 내가 좋아할 만한 이유를 찾고 공감할 수 있는 개인들의 역사가 모이는 것이 진정한 장르 문화를 꽃피우는 길이라고 믿는다. 그러한 미래를 위해서 지금 필요한 행동은 적극적인 독자의 직접적인 선별과 취향의 공유다.
유로스
생명공학 전공의 출판편집자. 경제, 사회과학, 아동, 자기계발 분야의 책을 편집했다.
고등학교 때 회원수 x만 명의 장르소설 커뮤니티에서 운영진을 맡았고, 군대에서는 장르음악 커뮤니티에 글을 썼다. 지금은 20대와 40대가 서로 닉네임으로 부르고 존댓말하며 서로의 오랜 취향을 존중하는
‘취향의 공동체들’에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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