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규칙을 싫어해요




소설집 『각인』의 날개에는 “좌뇌는 내팽개치고 우뇌로 써온 글”이라는 문장이 붙어 있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인간의 좌뇌는 이성·현재의식·논리·분석 등을 담당하고, 인간의 우뇌는 상상·직관·장기기억·잠재의식 등을 담당하고 있다. 물론 소설은 논설문이 아니며 소설의 언어는 일상의 언어와 같지 않다. 사실 작가가 단언하고 있는 만큼 『각인』의 서사가 불친절함을 목표로 하는 소설들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직관적이고 감각적인 인상을 충분히 전달하고 있다는 것은, 박애진 작가의 서사가 기본적으로 매우 탄탄하다는 것을 오히려 반증한다.



“왜 하나같이 고독할까.”


작가는 이 소설집에 있는 글들이 “세상 기준에서 소수에 속하는 사람, 다른 사람에게 말 못할 자기만의 아픔이 있는 사람, 스스로 숨는 걸 택하거나 숨어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기술한다. 작가에게 이 외로운 사람들의 ‘외로움’에 대해 질문하였더니, ‘우뇌적 작가다운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게요, 얘네 왜 이러지. 왜 하나같이 고독할까.”

“살아가는 건 결국 혼자라는 것, 삶은 견뎌야 될 무엇이라는 생각을 자주 했어요. 그래서 그 이야기를 계속 쓴 거죠. 삶이 왜 이렇게 고독하고, 왜 이렇게 힘들고, 왜 자꾸 견뎌야 할 무게가 되는 걸까. 태어난 이상 살아야 하고, 그건 생명의 대전제이자 정언명령이죠. 그런데도 산다는 것은 왜 이렇게 사람을 먹먹하게 하는 것일까, 그 이유를 추적해 나가는 과정이었죠.”


인간과 인간이 서로 도플갱어처럼 연결되어 있고,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없는 한에야 인간과 인간은 분명 홀로이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서로를 엮어나가려고 노력하고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다는 환각을 느끼고 싶어한다. 『각인』안의 단편 〈선물〉에서 남자 주인공 재민은 뱀파이어 혜연에게서 그 외로움을 충족시켰다는 환상을 어떻게든 추출해 내기 위해 자신의 피를 제공하면서까지 안쓰러울 만큼 노력한다.


재민은 가만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차가웠다. 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거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피만 마셨다. 그녀가 이야기한 적은 없지만, 재민은 확신했다. 그녀는 그를 떠나지 않을 거다. 어지러웠다. 더 잘 먹을 필요가 있었다. …… 괜찮다. 그녀는 여기에 머물고 있다. 재민은 눈을 감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게 아니다.  — 「선물」 중


『각인』 속 주인공들은 그 버거운 삶을 버텨내기 위해, 정언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그 몸짓은 그야말로 비극적이다. 심지어 「일상」의 주인공은 죽기 위해 안간힘을 써보기도 하지만, 그나마 죽어지지조차 않는다. 버거운 삶을 탈출할 수도 없고, 위안을 찾을 수도 없는 이들에게 삶은 커다란 쳇바퀴와 다르지 않다.



“저는 규칙을 싫어해요.”


“저는 규칙을 싫어해요.”

도발적인 말이었다.

“왜 꼭 그래야 돼, 하는 생각이 들어요. 삶이 이렇게 버거운 이유 중에 하나는 개인이 사회에 비해 너무 미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내 세계의 주인공인데, 그에 비해서 나는 외부 체제에서 너무 미약하고, 문제가 생기거나 불합리한 일을 겪었을 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굉장히 많은 경우에 그렇죠.

내가 세상을 과연 바꿀 수 있을까? 한 개인이? 한 개인이 자기 삶에서 희노애락을 겪으며, 크고 작은 일들 속에 절망하고, 좌절하고 극복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가도 세상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요. 인간이란 하나의 존재가 너무 작아서 생기는 박탈감이 있어요. 저는 영웅물에 굉장한 반감이 있었던 거예요. 한 사람이 세계를 바꾸고, 세상을 구할 수 있겠어요? 극소수의 사람들만 해내죠. 대다수는 실패해요.  누군가 이름을 날렸을 때는 그 사람을 돕거나 그 사람에게 희생당한 수많은 사람이 있는데 아무도 기억하지 않죠. 그러다보니까 체제를 벗어나지 못하는 개인, 개인이 어떻게 살든 체제는 체제대로 굴러가는 이야기들을 쓰게 된 것 같아요.”


박애진 작가의 중단편 중 독자들에게 유난히 많은 사랑을 받았던 「학교」는 바로 그 이야기다. 작가는 학교라는 특수한 공간이 가지는 상징성에 청소년이라는 주인공들을 덧씌워 매우 매력적인 ‘체제유지의 비극’을 그려낸다. 주인공은 살아남기 위해서 눈에 띄지 않게 타인들을 몰아낸다는 전술을 세우지만, 결국 패배한 채 체제 밖으로 몰려나서 희생 제물이 되지는 않아도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호모 사케르’로 살아간다. 


절대 이기지 못할 것이다. …… 모두 날 공격할 것이다. 난 제물이 될 것이다.  

— 「학교」 중


주인공 혜경은 희생되지 않고서도 체제의 강고한 지속성을 선험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시행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결국 살아남지 못한다.



"기본적으로 세상은 고통에 차 있고 그 근원 중에 하나가 가족이에요."


「학교」의 경우는 학교라는 상징물이 등장하지만, 학교 외에 이 소설집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체제의 아이콘은 ‘가정’이었다. 이 소설들 속의 고독한 주인공들은 대체로 가정에서부터 선천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고독한 맥락을 형성해서 서사 안으로 뛰어들었다.


“저는 세계가 불안정해지고 사람이 가장 불안정할 때 가장 믿을 수 없는 게 가정이라고 생각해요. 가장 음험하고 가장 거친 폭력은 가정에서 일어나요. 가장 안전해야 할 곳이 집인데 사실은 그 집이 그다지 안전하지 않거든요. 정말 건강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기본적으로 세상은 고통에 차 있고 그 근원 중에 하나가 가족이에요. 가족이야말로 가식의 절정인 거예요. 아무도 자기 집의 문제를 선뜻 얘기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모든 가족이 하나씩은 치명적인 문제가 있어요. 물론 없는 가족도 있겠지만 비밀이 있단 말이에요.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멀쩡한 가정이라는 전제가 깔려요. 가정이란 행복한 공간이어야 한다고 강요하는 거죠.”


가족은 시스템이 강제한 가장 기초적인 공동체다. 아이를 낳으면 그 공동체는 곧바로 ‘가족’으로 지칭되며, 그 아이를 ‘행복하게 키워내야 할’ 의무를 자연히 지게 된다. 규칙이란 살아 있는 자들이 시스템을 꾸려내기 위해 인위적으로 부여한 것이다. 그 인위에 대해 박애진 작가는 가장 낮은 단계부터 의문을 제기한다. 


외로움, 일그러짐, 체제, 폭력이라는 단어가 한바탕 그녀와 나 사이의 공간을 쓸고 지나간 후, 나는 피실피실 웃으며 물었다.

“행복한 소품 같은 거 쓰고 싶다는 생각 안 해봤어요? 다 비극이잖아요. 비극이 아닌 게 뭐야, 대체.”

“그 점 때문에 작가로서 한계를 많이 느껴요. 사실 비극이 더 쓰기 쉽거든요.”

“그건 박애진 작가이라서 그렇게 생각하는 걸 수도 있어요. 다른 사람들은 비극이 더 쓰기 힘들 수도 있어요.”

박애진 작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이 결국 혼자라고 생각하고 삶을 견뎌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직관에선 비극이 더 그리기가 쉬울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생활을 하기 위해서 자신과 타인의 내면에 그렇게 내밀하게 들어가지 않는다. 모두가 홀로이며 삶은 버겁게 버티는 것이라는 진실을 목도한 순간 생활은 유지가 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미래에 대해 행복이 있을 거라고 막연히 착각하며, 혹은 내 현실이 비교적 행복한 것이라고 멋대로 규정하며 삶을 지탱해 나간다. 박애진 작가는 굳이 그 환상의 벽을 부수어내어 보고 싶지 않을 내용물을 우리 앞에 끄집어 놓았다.



"인식하고 나면 또 깨고 싶어요. 이제는 큰 이야기 쓸 거예요."


헤어지기 전, 박애진 작가는 차기작에 대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했다.

“묘한 게, 제가 이걸 인식을 하게 된 거잖아요. 내가 개인이 체제를 바꾸는 이야기들에 손발이 오그라들고, 삶을 비극적인 시선에서 바라보고 있었구나. 사람들의 질문을 듣고 생각하다가 깨닫게 되는 순간들이 오더라고요. 그러면 또 그게 깨고 싶어요. 규칙이 싫으니까. 다음번엔 영웅물을 써야겠어요. 나도 엄격하게 틀을 짜서 멋진 주인공이 단계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소설을 쓰려고요. 좌뇌가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고.”

나는 칼 세이건의 말을 덧붙였다.

“한 인간도 별을 이루는 물질들로 구성되어 있죠.”

“아, 싫어. 이제는 큰 이야기 쓸 거예요.”

한 인간의 내면에 있는 우주를 거대하게 목도할 수 있는 그녀가, 그 인간들이 작용하는 더 거대한 이야기를 쓴다니. 나는 그 거대함에 대한 기대에 벌써부터 압도되어버렸다. 입안에서 별이 튀어나올 거 같은 표정으로, 그녀는 규칙 없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이서영

소설 쓰는 사회주의자.

1987년에 태어났고, 국문학과 문예창작학을 전공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세계의 모순을 반영하는 작업이기에, 세상사의 진행에 대한 극복할 수 없는 불신으로 글을 쓰고 있다.

2011년부터 환상문학 웹진 거울에 단편 「종의 기원」과 「성문 너머 코끼리」를 발표하며 활동을 시작했고 

2013년 온우주에서 작품집 『악어의 맛』을 출간했다.

SF&판타지 도서관의 의미



얼마 전 언론에서 인터뷰를 위해 찾아왔다. 여러 가지 질문이 있었지만, 이번에도 “‘SF&판타지 도서관’을 만든 이유”에 대한 질문은 빠지지 않았다. 사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난감하다. 도서관을 만들던 당시, 뭔가 큰 뜻을 갖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난 회에 소개했듯, ‘SF&판타지 도서관’은 한 술자리에서 지나가던 말로 시작했다. 물론 나름대로 진지하긴 했지만, 정말로 내가 가까운 장래에 도서관을 만들어 운영하리라곤, 게다가 5년이나 계속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언젠가 하고 싶다는 꿈 같은 말…… 뭐 그 정도였다.

하지만 농담에 가깝게 시작되었던 그 이야기는 불과 1년도 지나기 전에 현실이 되고 ‘SF&판타지 도서관’은 문을 열었다. 마치 게릴라의 비밀 아지트 같은 느낌이었지만, 사당동 주택가 지하의 작은 창고에서 그동안 모아두었던, 그리고 여러 출판사와 팬들이 보내준 책들을 모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시작하고 얼마 동안 도서관은 사람으로 가득했다. 연합신문을 시작으로 여러 언론에 소개되고 그로 인해 찾는 이들도 하나 둘 늘어나기도 했다. 물론 그 관심이 계속되진 않았고 곧 주말을 제외하면 찾는 이 별로 없는 조용한 장소로 바뀌었지만, 이따금 찾아온 팬들 덕분에 충실한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비록 임대료도 나오지 못하고 운영은 자원봉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부실한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하루하루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바로 지금 도서관이 열려서 돌아가고 있다는 점이 중요했으니 말이다. 이따금 들어오는 인터뷰에 “SF와 판타지 장르 문화의 발전에 이바지하면 좋겠다.”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뜬구름 잡는 식의 인사말에 지나지 않았고 사실은 그냥 도서관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마냥 좋았다.


책장 앞에 앉아 책을 보는 이들. 도서관은 내게 놀이터였다.



그러던 어느 날, 걸려온 한 통의 전화.

“SF&판타지 도서관이죠? 관장님과 상담을 할 수 있을까요? 제 아들이 지금 고등학생인데, 판타지 소설에 빠져서 헤어나질 못해요.”

당황했다. 사실 당시 ‘SF&판타지 도서관’은 내게 새로운 놀이터이자 장난감이었을 뿐이니까. 그런데 그런 놀이터의 소식을 보고 한 학부모께서 전화를 한 것이다. 단지 SF와 판타지를 좋아할 뿐인 청년인 내게. 그 목소리는 굉장히 고민하는 듯했고, 얼마나 힘든 마음인지 느낄 수 있었기에 처음에 나는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간단한 질문으로 시간을 끌며 머릿속을 정리한 끝에 겨우 몇 가지 얘기를 끄집어냈고 학부모 분의 감사 인사를 받은 것은 기억하지만, 지금 생각해보아도 당시 내 얘기가 정말로 도움이 되었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날 일은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계속 남아 있었고 고민하게 만들었다. 과연 ‘SF&판타지 도서관’은 어떤 곳이 되어야 하나, 라고.

 

‘SF&판타지 도서관’은 한국 내, 아니 어쩌면 세계에서 최초일지도 모르는, SF와 판타지 장르만 다루는 전문 도서관이다. 만화책을 포함하여 만 

5천권 정도의 장서를 소장, 전시하고, DVD 등 1000여점의 미디어 자료를 갖추고 있는, SF나 판타지 팬들, 주로 SF팬에게는 꿈과 같은 곳이라고, 아니 기적 같은 곳이라고 이야기되지만 사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SF와 판타지에 대한 대중적인 인식이 척박하다는 반증일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미국이나 일본에는 ‘SF 도서관’ 같은 게 없는 것이 아니라, 많은 도서관이나 박물관에 전문적인 SF 코너가 있으며(대표적으로 캐나다의 SF 작가인 주디스 메릴이 20만 권 가까이 기증하여 완성된 토론토 공립 도서관의 ‘메릴 콜렉션’이 있다.) SF 작가 기념관이 세워져 있고, 대학에 SF 강좌가 수없이 존재하며, SF 창작 클럽이나 강연회도 자주 열리는 반면, 한국에서는 서점은 고사하고 도서관에서조차 SF를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누군가 ‘SF&판타지 도서관’은 오아시스라고 한 적이 있다. 사막에 존재하는 오아시스…… 생각해보면 참으로 묘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말이야말로 한국이 SF와 판타지, 장르 문화의 불모지란 말이 될 테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SF&판타지 도서관’은 존재만으로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지 장르 문화를 좋아하는 이들이 함께 놀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기에 만든 곳이긴 했어도 생기고부터 5년의 시간이 흐르니 그 자체가 의미를 갖고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때가 있다. 적어도 내게 도서관은 단순히 놀이터로서의 공간, 그 이상의 무엇이 되었다. 만약 지금의 내게, 그리고 ‘SF&판타지 도서관’에 같은 전화가 걸려온다면, 나는 자신을 갖고 말할 것이다.

“언제고 아드님과 함께 SF&판타지 도서관을 찾아주십시오. 감동할 수 있는 책을 벗하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을 벗하면 단순히 책에만 빠져서 현실을 멀리하진 않을 겁니다.”




전홍식

SF&판타지 도서관 관장. 디지털 문화 정책 석사 전공. 게임 기획자이자 강사로 활동 중.

독서가 취미로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읽는다. 항상 즐거운 삶을 나누고 싶은 청년.

딘 쿤츠는 어떻게 해서 스티븐 킹에게 패배했는가?


유혹하는 글쓰기, 스티븐 킹. 김영사.
베스트셀러 소설 쓰는 법, 딘 쿤츠. 문학사상사.



안녕하세요. ‘메타서사연구가’라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타이틀을 마음대로 가져다 붙인 소설가, 번역가, 서평가 손지상입니다. 
이번 화를 시작으로 격월로 온우주 소식지 지면을 통해 제가 전해드릴 글은 ‘작법서 참고서’입니다. 
각종 매체와 장르의 작법서를 200여 권 읽어온 (돈 낭비한!) 제가 작법서를 선정해서, “이 작법서는 이런 용도에 이런 목적으로 이런 내용에 집중해서 보시길 바랍니다.” 하고 분석해 알려드리는 글입니다. 나사못에는 드라이버와 같이 도구는 사용 목적과 용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작법서라는 도구는 이 목적과 용도가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여러 작법서를 실제로 적용해보며 아직도 암중모색 중인 제가, 메타적으로 각 작법서가 어떤 용도와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면 좋을지를 설명해드리고자 합니다. 이것이 저의 목적입니다.


『유혹하는 글쓰기』가 그저 흥미로운 읽을거리라는 오해

첫 번째 이야기에서 저는 『유혹하는 글쓰기』와 『베스트셀러 쓰는 법』 두 권을 선택했습니다. 작자는 미국 대중소설계의 큰 형님인 스티븐 킹과 딘 쿤츠로, 두 사람에 대한 설명은 제가 구태여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이 둘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사람이라면 아마 온우주 소식지를 읽고 있지 않을 테니까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 플롯을 중시하던 딘 쿤츠가 왜 스토리를 중시하던 스티븐 킹 방식으로 돌아섰는가. 
, 애초에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말하는 플롯이나 스토리란 도대체 무엇인가 입니다.

딘 쿤츠가 스티븐 킹 방식으로 돌아섰다? 이에 대해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2012년 12월, 딘 쿤츠는 텔레비전 특집 방송에서 그동안의 작가 인생에 대해 인터뷰를 했습니다. 인터뷰 내용 중, 딘 쿤츠는 “나는 더 이상 시놉시스나 플롯을 미리 짜지 않고, 인물이 자유롭게 움직이게 한 뒤 이를 기록하듯 글을 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베테랑 중의 베테랑 딘 쿤츠도 결국 『유혹하는 글쓰기』로 ‘귀의’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딘 쿤츠도 알아보는 이 책의 진가를 사람들이 몰라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책이 작법서로는 별로고, 그저 재미있는 읽을거리에 불과하다는 식입니다. 심지어 인터넷에서 인기 있는 모 위키피디아에서도 그런 식으로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개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사실 저도, 제가 태어나서 맨 처음으로 읽었던 작법서다보니 진가를 몰라보고 그저 하라는 대로 따라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압니다. 이 책이 얼마나 ‘비급’인지를. 
이 책이 과소평가되고 오해를 받는 이유 중 하나는 이 책에서 말하는 스토리와 플롯의 개념을 보통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스토리와 플롯부터 재정의하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그래서 두 번째로 오해를 풀기 위해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말하는 스토리와 플롯에 대한 설명을 할까 합니다. 이를 먼저 한다면, 자연스럽게 첫 번째 목적도 달성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이 두 개념은 아직도 명확히 정의된 것이 아니고, 너무 두루뭉술하게 이해되어 명확히 정의된 바가 없습니다. 이는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저는 일단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말하는 스토리와 플롯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로 한정지어 글을 진행하겠습니다.
스토리는, 적어도 스티븐 킹이 이야기한 스토리는, 등장인물을 중심으로 시간 순서대로 진행되는 사건의 연속입니다. 여기서 포인트는 바로 인물입니다. 
『유혹하는 글쓰기』 198쪽에서 199쪽 사이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내가 보기에 소설은 장편이든 단편이든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 A지점에서 B지점을 거쳐 마침내 Z지점까지 이야기를 이어가는 서술 narration, 독자에게 생생한 현실감을 주는 묘사 description,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말을 통하여 그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대화 dialogue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플롯은 어디 있느냐는 질문이 나올 법하다. 대답은—적어도 내 대답은—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중략) 나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플롯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첫째, 우리의 ‘삶’ 속에도 (설령 합리적인 예방책이나 신중한 계획을 포함시키더라도) 플롯 따위는 별로 존재하지 않으므로, 둘째, 플롯은 진정한 창조의 자연스러움과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므로, 이 문제에 대해서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소설 창작이란 어떤 이야기가 저절로 만들어지는 과정이라는 것이 나의 기본적인 신념이다.


스티븐 킹의 이 말에, 오늘 제가 드릴 말은 전부 들어가 있습니다. 이제 하나하나 해설해보도록 하죠. 



사람이 있어야 소설이 산다


스티븐 킹이 말한 세 가지 요소 서술, 묘사, 대화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사람입니다. 

서술이라고 쓴 내레이션은 당연히 내레이터, 서술자를 필요로 합니다. 애초에 왜 내레이션을 할까요? 독자 들으라고 하는 것이지요. 

묘사는 어떤가요? 우리나라에서는 뭔가 애매모호한 어감이라 뭐든 다 묘사라고 하는데, 저는 묘사보다 “관찰 보고서”가 차라리 더 정확한 어휘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감을 통해 관찰한 결과를 언어로 변환시켜 보고하듯 전달한다는 이미지입니다. 따라서 관찰하는 사람을 전제로 하겠지요. 여기에 주관이 들어가느냐 아니냐에 따라 1인칭 시점이 되기도 하고 카메라 같은 객관적 시점이 되기도 합니다. 공통되는 부분은 관찰하는 주체를 전제로 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관찰 보고는 누구에게 하나요? 다 독자 들으라고 하는 것이지요.

대화는 어떤가요? 말할 필요 있나요? 이건 독자 들으라고 하는 면도 있지만, 애초에 대화 자체가 두 사람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말할 나위 없습니다.

세 가지 요소는 모두 사람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조금 더 부연하자면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이야기 내에 있는 경우도 있고, 외부에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소설은 언어로 구축하는 서사고, 언어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 없이 독자적으로는 존재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흔히 화자라고 하지요. 화자가 자신의 감정을 덧입혀서 서사를 전달하고, 이를 통해 감정이입을 만들어내는 것이 곧 소설의 ‘문학적’ 힘입니다. (그래서 영화에서 ‘문학적’으로 보이고 싶을 때, 손쉬운 방법으로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을 넣어 전체를 통일하는 ‘목소리’를 집어넣지요.) 결국 언어, 활자란 발화 상황과 발화자의 신체적인 감각과 기억에 의존해 의미를 전달합니다. 사람이 없다면 언어는 공허해집니다. 시놉시스와 소설의 차이는 여기에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사람이 필요한 또 다른 이유는 감정 때문입니다. 소설은 언어로 감정을 움직이게 하려는 시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애초에 감정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을 때 일어나는 생리적인 반응이고, 사람을 대상으로 쉽게 일어납니다. 따라서 감정의 대상이 될 타인이 없이는 감정이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최소한 어떤 형상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종교가 특정한 형상을 기도의 대상으로 삼지요. 사람은 감정과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일종의 인터페이스인 셈입니다. 따라서 감정을 크게 일으키고 싶다면, 이야기 밖에서 말하는 화자의 목소리, 그리고 이야기 안에서 말하는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그릴 필요가 있습니다.

문체란 이야기 밖의 화자가 내는 목소리, 스토리란 이야기 안의 등장인물들이 내는 목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플롯은 어떨까요? 잠깐, 그전에 플롯은 무슨 뜻일까요? 영어 플롯에는 원래 일이 미리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도록 짠 음모, 계획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스티븐 킹은 이 의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삶에는 플롯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합리적인 예방책, 신중한 계획은 있을 수는 있지만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지는 게 삶이고, 그래서 미리 정해진 방향대로 계획이나 음모를 짜서 그리로 억지로 끌고 가는 것은 부자연스럽고 좋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창조의 자연스러움과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게다가 계획을 세워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계획이란 상당히 추상적입니다. 인물이 없더라도 세울 수 있습니다. 감정을 움직이기에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더 쉽게 이야기하자면, 스티븐 킹은 결말에서 역산하는 식의 스토리 구성을 플롯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좋지 못하다고 하지만, 사실 스티븐 킹 자신도 대표작인 『데드존』 같은 걸작에서 이런 방식의 구성을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조차도 등장인물의 목소리와 감정을 섬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요는 얼마나 사람을 중심으로 작가가 상상력을 전개하느냐에 있겠습니다.


딘 쿤츠는 처음에는 플롯을 중시했습니다. 딘 쿤츠는 자신의 두 번째 작법서 『베스트셀러 소설 쓰는 법』에서 등장인물이 제멋대로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식의 소설 창작은 좋지 못하며, 예술가가 직접 상황을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엄격히 짜놓은 플롯이 없으면 제대로 된 작품이 나오지 않는다고요. 실제로 그는 20대 때 데뷔한 이후 단단히 플롯을 짜고 난 뒤 집필에 들어간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런 그가, 2012년 12월 인터뷰에서 자신은 이미 20년 전부터 플롯 위주의 글쓰기가 아니라 등장인물에 집중해 그가 어떻게 사건을 끌어나가나 관찰하고 그의 이야기를 듣는, ‘스토리’ 위주의 방식으로 집필 방식을 바꾸었다고 밝혔습니다. 여담인데,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저는 화가 나서 욕을 내뱉었습니다. 당신 말 믿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하고요. 대표적인 예로, 국내에서는 4권까지 번역되고, 미국에서 만화화되기도 한 ‘오드 토마스 시리즈’가 있습니다. 국내에는 4권까지 번역이 되었는데, 영능력자 오드 토마스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또 다른 예로는 국내에서는 크게 빛을 크게 보지는 못했지만, 얼마 전 개봉한 영화 <프랑켄슈타인>이 있습니다.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한 활극으로 딘 쿤츠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소설은 꽤 히트를 친 모양입니다. 이 소설들은 딘 쿤츠가 스스로 패배선언을 한 것이나 다름없는 소설들입니다. 플롯 위주보다 스토리 위주가 더 좋다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플롯이 아예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등장인물에 집중하는 편이 독자에게나 작가에게나 즐거운 경험을 선사한다는 것입니다. 딘 쿤츠는 인터뷰에서 처음에는 일일이 시놉시스를 짜서 편집자에게 제출하고는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시놉시스와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어버리기 일쑤였고 달라진 이야기가 훨씬 재미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시놉시스를 미리 쓰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즉 미리 계획하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인물과 플롯이 합쳐져야 스토리가 생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중요한 것은 상황입니다. 어떤 인물이 어떻게 행동할지는 상황에 달려 있습니다. 특이한 인물을 특이한 상황에 밀어 넣어보세요.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그 등장인물의 존재감, 특이한 점, 남다른 점, 독특한 점, 공감 갈 만큼 평범한 점, 버릇 같은 것을 생생히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를 언어로 표현하는 게 먼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의 친구를 설명할 때 말로 이러이러하다, 라고 정의 내리나요? 애매모호하고 특정한 사건은 떠오를지 몰라도 이렇다, 라고 하기에는 사람은 너무 복잡하지 않나요? 그래서 보통 이렇게 설명하지 않나요? 

“걔는 라면 먹다 국물이 뜨거워도 국물부터 먹는다고 정했으면 입천장 다 데어도 국물부터 먹는 애야.”

“걔는 친구냐 여자냐 하는 상황에서는 꼭 여자를 택해. 그래놓고 나중에 몰래 와서는 내 맘 알지, 그런다니까?”

어떤가요?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는가, 그 사람이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가와 같은 상황에 반응하는 모습을 통해 그 사람의 성격을 정의할 수 있습니다. 딘 쿤츠도 자신의 책에서 성격묘사는 이렇게 행동을 통해 묘사해야 한다고 밝힐 정도였으니까요. 

성격을 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황을 정해야 합니다. 상황은 얼핏 계획과 마찬가지로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실제로 상황은 매우 한정적이어서, 클리셰나 다름없습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는 가는 그 개인이 살아온 인생과 갖추고 있는 성격에 따라 천차만별입니다. 여기서 개성, 존재감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다시 한 번 『유혹하는 글쓰기』를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새로운 시각으로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스토리란 결국 인물이 다른 인물과 서로 이해관계가 충돌해서 벌어지는 일의 과정입니다. 새로운 일이 터지지 않으면 스토리는 진전되지 않지요. 하지만 스토리를 위해서는 타인이 항상 전제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플롯을 중시하던 딘 쿤츠는 이렇게 패배하였고, 플롯과 스토리의 조화를 찾게 되었습니다. 작가 생활 35년 만에 얻은 깨달음이었죠. 그렇다고 인물을 신경 쓰지 않은 것은 절대 아니에요. 그가 새파란 풋내기였다고 스스로 인정했던 20대 때 처음 쓴 작법서, 『카테고리 픽션 쓰는 법』에는 인물도, 인물이 품고 있는 가치관이자 세계관인 주제도 다루지 않는다고 못을 박고 책을 시작했을 정도입니다. 당연히 인물에 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없었습니다. 과학소설, 고딕소설, 로맨스소설 등등 인물의 깊이가 요구되지 않는 세계에서 글을 쓰던 작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그가 미국의 메인스트림 노벨, 다시 말해 대중소설의 세계에 뛰어들고 나서야 그는 인물을 깊이 있게 다루는 것이야 말로 소설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최고 수준의 작가가 되었지요. 그 경험을 살려 쓴 작법서가 『베스트셀러 소설 쓰는 법』입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인물과 이야기가 따로 노는 소설을 써왔습니다. 결론을 이미 정해놓고 쓰는 글쓰기였지요.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결론이 작위적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지요. 소설의 핵심인 인물과 소설의 흐름인 플롯이 합쳐질 때, 스토리가 생겨납니다. 딘 쿤츠는 드디어 이를 깨달았고, 자연스럽게 사람을 중심으로 한 소설을 쓸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마치


저는 『베스트셀러 소설 쓰는 법』을 추천하지 않습니다. 분명 좋은 책이지만, 중역본에다가 발췌번역을 했거든요. 하지만 플롯의 중요한 점, 플롯 구성하는 요령, 작가로서의 자세, 장르별 특징, 문체의 특징 등 알아야 할 기술이 잔뜩 들어 있는 좋은 책입니다. 

저는 『유혹하는 글쓰기』도 그냥 추천하지 않습니다. 사용하고 있는 용어의 의미가 명확하지 못해 실질적으로 도움이 못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소설가의 현실과 소설쓰기라는 삶의 방식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선불교 같은 책입니다. 매우 좋은 책이고, 반복해서 봐야 할 책입니다. 특히 사람을 중심으로 소설을 쓰는 법을 직접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래서 매우 좋은 책입니다. 

이 글은 일종의 주석인 셈입니다. 이 주석을 토대로 두 책, 특히 『유혹하는 글쓰기』를 이해하고 이를 여러분의 소설에 적용하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여러분의 소설이 더 강력해지기를 기원하면서, 글을 마칩니다. 







손지상

세미프로를 자처하는 소설가, 번역가, 자유기고가.

여러 장르의 작법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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